로버트 고다드 #생애
  • 고다드는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에 이미 과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고, 16살에는 갓 출판된 H.G. 웰스의 SF 고전 「우주 전쟁」(1898)을 읽고 우주에 대한 흥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이듬해 1899년 10월 19일에 뒷뜰의 높은 앵두나무에 죽은 가지를 잘라내려고 올라갔는데, "나는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올라갈 때와는 다른 소년이었다. 마침내 존재가 매우 뜻깊게 여겨졌다"고 훗날 적었다. 나무 위에서 그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우주 비행의 개발에 평생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날을 개인적인 기념일로 삼고 잊지 않았다.
레오 실라르드 #영국 생활
  • 실라르드는 1933년 나치의 유대인 사냥에서 벗어나 런던으로 건너왔다. 바로 그 무렵 그는 핵에너지의 실용화 가능성을 부정하는 어니스트 러더포드의 글을 타임즈에서 읽고 그의 속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일년 전에 실리르드는 H. G. 웰스의 1914년 과학소설해방된 세계》에서 인위적 핵붕괴를 이용하는 "원자탄"[1]에 대한 공상과학적 묘사를 읽고 웰스의 상상력에 공감하였다. 그해 1933년에 실라르드는 핵연쇄반응제어를 설계하고 그 이듬해에 그것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핵연쇄반응의 평화적 이용과 전략적 이용의 길이 열렸으므로 실라르드의 공로는 그만큼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아주 딴판이다. 한편, 런던 대학 UCL윌리엄 람세이와 캠브리지 대학의 어니스트 러더포드와 함께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옥스퍼드 대학의 프레데릭 소디는 "경제적 파라독스의 해결"에 관한 1926년 저서에서 웰스의 그 소설을 높이 평가한 바 있었다.
레오 실라르드 #미국 생활
  • 실라르드는 만하탄 프로젝트 추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과 나치의 개발 가능성을 보고하고 미국의 개발 필요성을 제안하는 비밀 서신를 작성하였다. 그는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을 찾아가서 그 서신에 서명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그 제안에 아인슈타인 명성만큼의 무게를 실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실라르드 서신"은 미국 정부가 핵분열 연구를 추진하고 마침내 만하탄 프로젝트를 탄생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 본건 실시!"라는 지시와 함께 그 서신을 에드윈 파 왓슨 대장에게 넘겼다.
  • 웰스는 월드 브레인의 추진을 1937년에 처음으로 제창하면서, 과거의 백과사전은 소수 엘리트의 요구만을 만족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런 책들은 공교육 개념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던 시절에 "신사들을 위해서 신사들에 의해서"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월드 브레인: 항구적인 월드 엔사이클로피디아 구상〉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웰스는 그 무렵의 백과사전들이 기록된 지식의 지속적 증가 그리고 쉽게 접근가능한 정확한 정보를 요구하는 서민들의 증가에 적응하는 데 어떻게 실패했는지 설명한다. 19세기 백과사전은 18세기 방식, 체제, 규모를 답습했다. "현재 우리 백과사전은 자동차와 비행기에 걸맞기보다 아직도 말과 마차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 월드 엔사이클로피디아의 창출은 "우리가 요즘에는 꿈꾸기 어려운 상호 이해 그리고 공동 목적과 공동 번영을 향한 합의"가 있었던 과거의 평화로운 시절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에 따르면, "항구적 월드 엔사이클로피디아"는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 이념을 창출함으로써 "인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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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웰스가 《해방된 세계》(1914)에서 원자탄("atomic bomb")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의 상상력은 31년후 (1945년)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실제 원자탄으로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우리의 광복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가 나몰라라 하는 건 도리가 아닐 듯. 허버트 조지 웰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