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말 신라의 내부적 모순이 격화되고 중앙권력이 약화되면서 전국은 호족과 군벌이 난립하는 난세가 된다. 이러한 혼돈을 거쳐 호족 출신의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각각 후백제와 태봉(泰封)을 세우면서 대국을 이끈다. 또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 호족출신인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개성으로 옮긴다. 결국 왕건은 궁예와 견훤을 제압하고 신라의 항복을 얻어내면서 통일국가를 형성해나간다. 이러한 중에 왕건은 내치에 힘쓰는 한편, 외교와 군사작전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하고 북진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한편, 불교를 숭상하고 호족세력을 포섭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한다. 하지만 초기의 왕권은 강력한 호족과 개국공신이 있었기 때문에, 945년(혜종2) 왕규의 란,왕식렴의 군대를 이용한 정종의 즉위와 서경(西京) 천도 추진 등 왕권이 불안정하였다. 이런 중에 임금에 오른 광종은 강력한 철권통치를 통해 고려의 안정을 가져온다. 왕권확립을 위해 과거제도의 채용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공복(公服) 제정, 훈신 숙청을 통하여 과감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했다. 성종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활용하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향직을 개편하여 호족의 지위를 격하했다. 성종부터 현종에 이르는 사이 거란과의 대립으로 전쟁도 치르지만, 거란을 격퇴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해나갔다. 현종대에는 군현제도와 군사제도의 골격을 마련했으며, 문종대에는 국가 통치체제의 정비를 마무리지어 숙종·예종·인종대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듯이 귀족정치의 꽃을 피우던 고려도 이들의 오만과 타락으로 1170년 정중부 등이 주도한 무인란을 초래한다. 무반에 대한 차별과 군인의 불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무인란은 고려사회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고(정중부의 난), 권력을 장악한 무인들은 집권문신들을 대거 숙청·살해하고, 왕을 세우고 끌어내리기를 마음대로 했다. 정중부·경대승·이의민에 이어 집권한 최충헌은 과감한 전제정치로 정권을 안정시켜, 이후 4대 60년간의 최씨집정시대를 열었다. 무인정권기에 왕은 유명무실해지고, 집권무인이 정방(政房),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행사하고, 경제기반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사회경제적 모순을 격화시켰다. 1231년 초원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뻗어가던 몽골군의 침입으로 무인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쟁하였지만, 6차례 침입으로 전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고는 고갈되었다. 그러나 집권층은 계속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농민에 대한 수탈도 가혹해져 농민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다가 1258년 최의가 김준, 임연 등에 의해 제거되고 왕과 문신들에 의해 몽골과 화의가 이루어져 환도하는 과정에서 무인정권은 임유무를 마지막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결국 고려는 몽골의 영향아래 놓여지면서 몽골에 의한 공물 수탈과 일본 정복과정에서의 가혹한 수취, 원을 오가는 데 사용하는 비용의 마련, 원이 설치한 응방(鷹坊) 등의 각종 기관과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 등으로 고려사회는 국가재정이 궁핍해지고 농민은 몰락하는 이중의 모순에 처했다. 심각해진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선왕(충선왕), 현왕(충목왕)을 중심으로 신진관료들에 의해 추진되기도 하나, 결국은 실패했다. 14세기 후반 내외의 모순이 중첩되어 있던 고려의 현실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해결의 계기를 마련했다. 몽골이 초원으로 옮겨가고 중국 대륙에서는 명나라로 교체되는 대륙 정세의 변동을 이용하여 공민왕은 몽골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변발·몽골식 의복 등 몽골풍속을 폐지하였으며(당시 몽골에서도 고려풍이라하여 고려의 문화가 유행한다), 몽골의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폐지하고, 몽골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몽골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한 신돈(辛旽)을 등용하고 전민변정사업을 전개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고, 추진세력의 미약함과 권문세족의 반대 그리고 계속된 왜적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사회경제 기반이 파괴되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신돈에게 의지하던 공민왕은 주위의 이간질과 신돈의 권력 확장에 위협을 느껴 신돈을 처형하였고, 그 후 공민왕마저도 살해되었다. 이런 와중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집요하게 사회모순의 개혁을 요구하는 신진사대부, 몽골, 왜구·홍건적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한 무장이 정치세력으로 결집하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공민왕 이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권문세족과 개혁세력 간의 갈등이 심해지다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대세는 개혁파에게 돌아갔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세우고, 사회모순의 척결을 주장해 온 정도전, 조준 등 신흥사대부들과 연결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함으로써 사전(私田)의 폐단을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개혁론자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자 고려는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