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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9년편집

사람편집

1, 조선 국왕(朝鮮 國王)편집

재위 한 왕은 모두 27인 이였고 승하한 후 제법(祭法)에 따라 조공종덕(有功曰祖 有德曰宗)에 의해 묘호(廟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왕을 칭할 때 이 묘호를 쓰고 있다. 단종은 왕이었으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묘호가 없다가 1698년(숙종 24) 복위되어 단종(端宗)이라 하였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에서 폐위되고, 종묘에 오르지 못하여 시호나 묘호를 받지 못해 군호로 불린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경우 조선의 국왕이 아닌 대한제국 2대 황제이나 1926년 이왕직 장관 제안으로, 태묘(太廟)에 순종(純宗)의 묘호가 올려져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역대 임금

  • 태조【제 ①대 太祖-6년/건원릉 建元陵,】-1392년 7월 17일 고려 공양왕(恭讓王)으로부터 양위받아,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태조가 되어 서울로 천도하여 경복궁을 세웠다.
  • 정종【제 ②대 定宗-2년/후릉 厚陵】-제1차 왕자의 난 이후 1398년 9월에 태조의 양위로 국왕으로 즉위하여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 태종【제 ③대 太宗-18년/헌릉 獻陵】-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정종의 양위로 강안전[1]터에서 즉위한 후, 서울에 창덕궁을 세워 재 천도하였다.
  • 세종【제 ④대 世宗-32년/영릉 英陵】-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과 각종 기술서적 편찬 및 법전정비. 유교성리학의 정립등 중국 의존체제에서 주체국가의 틀을 세웠다.
  • 문종【제 ⑤대 文宗-2년/현릉 顯陵】-세종의 장남으로 무려 30년을 세자로 지냈고, 8년을 대리청정한 역대 왕위수업을 가장 길게 하여 완벽한 계승자였다.
  • 단종【제 ⑥대 端宗-3년/장릉 莊陵】-세종의 왕세손으로 부왕 문종이 2년 3개월만에 급서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정난(1453)으로 세조에게 양위하니 영월에서 죽였다.
  • 세조【제 ⑦대 世祖-13년/광릉 光陵】-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가 즉위전 가진 관직이다.
  • 예종【제 ⑧대 睿宗-1년/창릉 昌陵】-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 9월에 까닭 없이 갑자기 20세로 훙서(薨逝)하자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이 되었다.
  • 성종【제 ⑨대 成宗-25년/선릉 宣陵】-아버지 의경세자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일찍 죽어 정희왕후와 훈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 연산군【제 ⑩대 燕山君-12년/연산군묘 燕山君墓】-어머니 폐비윤씨 충격으로 황음(荒淫)에 빠졌고,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31세로 폐위되었다.
  • 중종【제 ⑪대 中宗-38년/정릉 靖陵】-인조반정, 성희안·박원종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임사홍·신수근등을 죽이고 왕으로 추대 하였다
  • 인종【제 ⑫대 仁宗-1년/효릉 孝陵】-대윤 모후(母后) 장경왕후 윤씨가 7일만에 승하하여, 소윤이며 계모인 문정왕후 학대에 시달려 일찍 죽었다.
  • 명종【제 ⑬대 明宗-22년/강릉 康陵】-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으로 왕권이 없었고, 이복 조카인 하성군(선조)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승하하였다.
  • 선조【제 ⑭대 宣祖-41년/목릉 穆陵】-중종의 서손으로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이였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 백성과 국토 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 광해군【제 ⑮대 光海君-15년/광해군묘 光海君墓】-서자소생 왕으로 전후 수습을 하면서 폐허가 된 과도한 궁궐공사와, 폐모살제가 빌미가 되어 인조반정으로 폐조가 되었다.
  • 인조【제 ⑯대 仁祖-26년/장릉 長陵】-직접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었고, 정묘호란 병자호란등 국제정세의 오판으로 청(淸)의 속국이 되어 백성 50만이 끌려갔다.
  • 효종【제 ⑰대 孝宗-10년/영릉 寧陵】-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이 되었으며, 북벌정책을 세워 군비강화에 힘썼고, 수전증이 있던 어의에게 침을 맞다 갑자기 숨졌다.
  • 현종【제 ⑱대 顯宗-15년/숭릉 崇陵】-효종의 아들로 심양에서 태어났고, 기해년(1659)과 갑인년(1674)의 예송논쟁으로 서인(송시열).남인(허목)의 지역감정이 이때에 생겨났다.
  • 숙종【제 ⑲대 肅宗-46년/명릉 明陵】-14세에 즉위하여 섭정을 받지않고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장희빈. 허적 송시열 사사등과 백두산정계비등 영토 보전에 힘썼다.
  • 경종【제 ⑳대 景宗-4년/의릉 懿陵】-숙종의 맏아들로 어릴때 부터 병약하여 후계자 문제로 부왕 때 이이명 독대 사건이 있었고, 왕세제 신분이던 영조가 2년간 왕을 도왔다.
  • 영조【제 ㉑대 英祖-52년/원릉 元陵】-삼종혈맥[2]의 숙종의 유교(遺敎)로 즉위하였고, 붕당타파를 위하여 외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으며 83세까지 장수한 왕이다.
  • 정조【제 ㉒대 正祖-24년/건릉 健陵】-사도세자[3]의 아들이며 효장세자[4]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수원성을 건설하고 통공(通共)정책으로 상업질서를 혁파하고 규장각을 세웠다.
  • 순조【제 ㉓대 純祖-34년/인릉 仁陵】-부왕의 급서로 11세에 왕이되어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하였다. 천주교 탄압이 이어졌고 전염병 등 재변이 끊이질 않았다.
  • 헌종【제 ㉔대 憲宗-15년/경릉 景陵】-아버지 효명세자가 22세에 죽자 8살에 즉위하여 할머니 순원왕후 수렴청정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 전횡이 심하여 왕권이 없었다,
  • 철종【제 ㉕대 哲宗-14년/예릉 睿陵】-헌종이후 서손마져 없어 거슬러 올라가 영조의 혈손으로는 이원범(철종)이 있어 왕이 되었다. 세도정치 등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 고종【제 ㉖대 高宗-44년/홍릉 洪陵】-12세에 익종의 대통을 계승시킨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 경복궁을 중건하고, 친정 후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
  • 순종【제 ㉗대 純宗-3년/유릉 裕陵】-조선의 국왕이 아닌 대한제국 제 2대 황제이나, 1926년 태묘에 순종(純宗)의 묘호가 올려져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2, 추존(追尊)된 왕과 대원군편집

이안사 追)목조대왕(穆祖大王)/효공왕후(孝恭王后)←高祖父

이행기 追)익조대왕(翼祖大王)/정숙왕후(貞淑王后)←曾祖父

이 춘 追)도조대왕(度祖大王)/경순왕후(敬順王后)←祖父

이자춘 追)환조대왕(桓祖大王)/의혜왕후(懿惠王后)←李成桂의 父

조선 태조 이성계(朝鮮 太祖 李成桂)/신의왕후(神懿王后 韓氏),신덕왕후(神德王后 康氏)

재위중인 왕의 장남이 왕위계승 제1순위이고 적손이 제2순위이다. 다음으로 차남 등 적통(嫡統)이 이어서 왕위계승이 원칙이였으며, 적통마져 대가 끊겨 방계(傍系)가 왕위를 이어받을 때, 그 왕의 친부에게 올린 군호 및 추존왕이다.

추증 왕

  • 덕종(德宗),의경세자/소혜왕후 한씨 ←제 9대 성종의 부모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德宗)이 조선 최초였다.
  • 원종(元宗.定遠大院君 琈)/인헌왕후 구씨 ← 제 16대 인조의 부모 인조의 아버지 이부는 아들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는데, 세자가 아닌 대원군이 추증왕이 될 수 없다는 10여년의 논쟁끝에 1632년 원종(元宗)으로 추증되었다.
  • 진종(眞宗),효장세자/효순왕후 조씨 ←제 22대 정조의 양부모 영조의 맏아들로 영조 즉위년(1724)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10세에 홍역으로 죽은후 정조가 즉위하면서(1776)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 장조(莊祖),사도세자/헌경왕후 홍씨 ←제 22대 정조의 친부모↑ 정조의 친아버지이고, 진종과 장조는 이복형제이다. 영조의 2째 아들이며 2살(1736) 때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7월 4일 뒤주에 갇혀서 8일만에 죽으니 향년 28세였다.
  • 익종(文祖. 翼宗),효명세자/신정왕후 조씨 ←제 24대 헌종의 부모 4세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22세(1830)에 생을 마감했으며,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文祖. 翼宗)으로 추존하여 조선왕조 마지막 추증왕이다..


역대 대원군

  • 덕흥 대원군 초(德興大院君 岹)/하동 부대부인 정씨 ←제 14대 선조의 부모 중종의 7남(서자)이 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이 최초이다.
  • 정원 대원군 부(定遠大院君 琈)/연주군부인,[인헌왕후 구씨]← 제 16대 인조의 부모 선조의 5남(서자)이 자 인조의 아버지가 인데 나중에 원종(元宗)으로 추증되었다.
  • 전계 대원군 광(全溪大院君 㼅)/측실 용성부대부인 염씨 ←제 25대 철종의 부모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莊祖)의 서 장남인 은언군 인(恩彦君 䄄)의 아들이 전계대원군(全溪)이고 철종의 아버지이다.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니 순원왕후가 원범(철종)을 계승자로 정하였으나 항렬이 하나 위였다. 우선 원범을 자신의 양자로 삼은 다음 덕완군 이라는 군호를 내리고, 바로 효명세자의 형제이자 헌종의 숙부로 입적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 흥선 대원군 하응(興宣大院君 昰應,생전에 작위를 받았다)/순목대원비 민씨 ←제 26대 고종의 부모 영조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아들 즉 고종의 아버지가 흥선대원군(興宣)이고 생전에 대원군 칭호를 받았다.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이명복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3, 왕위 계승을 못한 왕세자편집

왕비가 낳은 적장자가 왕위계승 순위 1위가 되고 줄여서 세자(世子)라 부르며, 이에 따른 후계자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 뿐이고,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정쟁에 휘말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는 합하여 11명 이였다.

  • 의안대군 이방석(芳碩,1382-1398),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의안대군 이방석(1382-1398)이 이복형인 정안대군(태종)이 일으킨 난으로 건국 최초로 살해 되었고, 무인정사(戊寅定社)또는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 양녕대군 이제(禔,1394-1462), 태종의 장남으로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태종이 좌의정 유정현의 상소를 받아들여 동생 충녕대군(세종)이 왕세자가 되었다.
  • 의경세자 이장(暲,1438-1457), 세조의 장남으로 20세에 요절하여, 차남 성종이 즉위하여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 폐세자(廢世子) 이황(𩔇,1498-1506), 연산군과 폐비 거창신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이며, 아버지가 페위되자 유배지에서 9세에 사사되었다.
  • 순회세자 이부(暊,1551-1563), 명종의 아들이며 중병으로 13세에 요절하였다.
  • 폐세자(廢世子) 이지(祗,1598-1623), 광해군의 장남이고 아버지 즉위와 동시에 11세에 세자에 책봉 되었으나, 26세 때 아버지가 폐위되어 희생됐다.
  • 소현세자 이조([5]1612-1645),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만에 돌아왔으나 의문의 죽음으로 동복동생 봉림대군(효종)이 왕이 되었다.
  • 효장세자 이행(緈,1719-1728), 영조의 맏아들로 7살에 세자로 책봉되고, 10살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요절하여 양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 사도세자 이선(愃,1735-1762), 영조나이 42세 때 태어났고, 죽은 효장세자 이복동생이고 1살 때 세자로 책봉되며, 15세에 영조의 대리청정을 할 때 정치적 갈등으로 당쟁에 휘말려 노론의 미움으로 뒤주에 갇혀 1762년 비극의 죽음을 당했고 장조(莊祖)로 추존 되었다.
  • 문효세자 이순(㬀,1782-1786), 정조의 장자로 어머니는 의빈 성씨이며 순조의 이복형이다.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을 조성한 자리가 지금의 효창공원이 되었다.
  • 효명세자 이영(旲,1809-1839), 순조의 장남으로 4세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1세에 가례를 올려 19세에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지만 4년 후 죽게 되니 아들 헌종이 8세에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하였다.

4, 수렴청정편집

역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왕후는,

  • 1468년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 윤씨가 예종을 1년동안 수렴청을 하던 중 죽었고, 한명회와 밀계하여 성종을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대를 이었다.
  • 1469년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 윤씨가 성종을 수렴청을 7년동안 하였고, 친모 소혜왕후(昭惠王后)/덕종) 한씨는 훗날 仁粹大妃에 올랐다.
  • 1544년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 윤씨는 인종이 12세에 즉위하니 8년 동안 하였다.
  • 1567년 인순왕후(仁順王后/명종) 심씨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16세에 즉위하니 선조를 1년 동안 수렴청정 하였다.
  • 1800년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 김씨가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에 즉위하니 3년 동안 수렴청정 하였다.
  • 1834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 김씨가 순조가 죽고 헌종이 즉위하자 6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던 중 헌종이 죽었으며,
  • 1849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 김씨가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이어서 하였다.
  • 1863년 신정왕후(神貞王后/문조(文祖, 翼宗) 조씨가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2년 동안 하였다.

5, 기타 역대 기록편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과 가장 짧은 왕 가장 긴 왕은 제 21대 왕 영조로써 그의 재위기간은 무려 52년에 달한다.가장 장수한 임금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이고,

  • 40년 이상 왕위에 있었던 왕.

선조: 41년/숙종: 46년/고종: 44년.

  • 반대로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은 제 12대 왕 인종으로 그의 재위 기간은 고작 8개월이다. 인종은 조선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이 있는 임금이기도 하다.
  • 가장 단명한 임금은 17세에, 세조에게 사약을 받고 승하한 단종이다.

자식을 가장 많이 둔 다산왕

1위 제 3대 태종이다. 12남 17녀(29몀)를 두었다. 2위 19대 임금 성종이 16남 12녀(28명)로 뒤를 이었고, 3위 선조가 14남 11녀(25명)의 자녀를 두었다.

  • 자녀가 한명도 없던 왕은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이다.

왕이 가장 많은 병

1위는 등창(종기)으로 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정조. 순조등 7명으로 승하하였다. 특히 정조는 종기 치료에 대해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 49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인 종기가 도져 탕약을 먹자마자 쓰러져 죽게되어, 남인들은 적대관계에 있던 노론 벽파를 의심하였다. 즉 정순왕후를 지지한 세력이였기 때문이다.

세자로 가장 긴 시간을 보낸왕

  • 1위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으로 무려 33년(2세에 세자에 책봉 됨)의 기간을 세자 신분으로 지냈다.
  • 2위 경종: 31년.
  • 3위 문종: 30년.
  • 4위 인종: 25년.
  • 5위 정조: 18년.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왕

  • 1위 제3대 태종과 제9대 성종으로, 각각 12명의 부인을 두었다.
  • 2위 제 4대 세종이 6명의 부인을 두었다.

왕의 장남으로 왕위계승을 한 왕

모두 7명으로

  •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으로 7명 뿐이다.

후궁이 없었던 왕

  • 단종. 현종. 경종은 후궁없이 오직 한명의 부인만 두었다.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청주한씨이다.

  • 태조/신의왕후, 덕종/소혜왕후, 예종/장순왕후. 안순왕후, 성종/공혜왕후, 인조/인열왕로 총 6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왕비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비

  • 1위: 세종/소현왕후로 모두 10남매를 낳았다. 소현왕후 친정은 외척을 염려한 태종에 의해 멸문이 되고 폐비 논란까지 일지만, 많은 자녀를 낳은 공이 인정되어 폐비는 면한 알고보면 비운의 왕비이다.
  • 공동 2위: 태조/신의왕후 8남매, 태종/원경왕후 8남매.
  • 4위 효종/인선왕후 7남매.

사건[事件]편집

역대 반정편집

  • 계유정난(1453),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고명대신들을 포함하여 동생 안평대군까지 죽이면서 그 명분을 "이용((李瑢)이 붕당을 조성하여 모반(謀反)의 음모를 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위 음모로 연루된 자 70여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조선 최초의 구테타였다.
  • 중종반정(1506) 연산군의 폭정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진성대군 이역을 옹립하여 즉위하게 한 사건이다. 연산군이 폭정과 황음(荒淫)에 빠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그 정도가 극에 달하여 폐왕이 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
  • 인조반정(1623)능양군 이종(인조)이 스스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임진왜란 수습을 하면서 폐허가 된 과도한 궁궐공사와, 폐모살제가 빌미가 되어 인조반정으로 폐조가 되었다.

조선 영토 주권을 침범한 전란편집

  • 한반도 남쪽에는 왜(倭)가 침입하여 1592년부터 임진왜란과 이어서 1597년 화의결렬로 정유재란이 있었고, 이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섬멸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 북으로는 1627년 후금(後金. 나중에 淸)이 침입할 때 무방비로 당하여 패한 것을 정묘호란이라 하고,
  • 뒤이어 1636년 청나라 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한다. 이때 군신관계를 맺었으며, 패국의 수모는 임금을 비롯하여 백성들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 조선 말기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밀물에 쇄국정책으로 맞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조선왕조의 막을 내린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가 대표적인 멸망의 원인이었다.

조선시대 3대 의적편집

  • 홍길동의 난은 연산군 6년(1440) 양반 복장으로 행세를 하면서 관청을 습격하여 식량 등으로 농민을 도운 사건이며,
  • 임꺽정의 난은 명종 14년(1559)양주 출신 백정이 황해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관리들의 도가 넘는 수탈에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해 식량등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도적이었고,
  • 장길산의 난은 숙종 23년(1697) 구월산을 중심으로 서얼 출신과 승려들이 봉기하여 사회 하위계층의 불평등을 분출한 사건이다.

역대 내란편집

  • 1차 왕자의 난(1398)인 이방원이 왕위 계승권을 두고 방석과 정도전등을 제거하였고,
  • 2차 왕자의 난(1400)은 지중추부사 박포가 이방간을 부추겨 이방원과 싸운 사건이며,
  • 동북면의 난(1402)은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가 태조의 현비(顯妃) 강 씨(康氏)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북면(東北面)에서 일으킨 사건이고,
  • 이징옥의 난(1453)은 단종 1년 김종서의 피살과 관련되어 세조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대금 황제(大金皇帝)라 칭하며 일으킨 반란이다.
  • 이시애의 난(1467)은 토족 호반인 이시애가, 세조가 함길도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데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고,
  • 이몽학의 난(1596)은 왕족의 서얼로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에서 사회적 불만으로 일으킨 반란이다.
  • 이괄의 난(1624)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논공행상 과정에 2등 공신으로 봉해져 평안도 변방으로 파견되자 불만이 있었고, 반대 세력인 이귀등이 오히려 역모를 꾸미니 문초를 주장하나 인조가 말리자, 다시 아들인 이전(李旃)을 한양으로 압송해 오도록 윤허를 받고,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인조가 궁을 버리고 도망가니,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일으킨 반란이고,
  • 이인좌의 난(1728)은 영조 즉위 초 이이명과 숙종의 군신독대로 영조(延礽君)가 왕이 되니 소론과 남인 일부 세력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밀풍군(密豊君) 탄(坦:소현세자 증손)을 추대하여 일으킨 왕통 부정의 반란이다.
  • 홍경래의 난(1811)은 순조 11년 우군칙(禹君則)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며 상인들이 부(富)를 통하여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변화에 저항한 농민 반란이다. 이때 김삿갓의 조부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 항복하여 연좌제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다.
  • 임술 민란(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진주 인근 단성면에서 최초로 반란이 시작되어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 전역으로 확대된 민란으로, 1년 전 우병사로 부임한 백낙신(白樂莘)이 6만 냥의 돈을 가호(家戶)에 배정하여, 백징(白徵:죽은 자에게도 세금 부과)의 만행에 격발했고 철종 때의 안동 김 씨 세도정치의 문란을 말해준다.
  • 임오 군란(1882)은 고종 친정 후 훈국병(訓局兵)들이 별기군(別技軍)과의 급여(軍料)의 차별 지급에 불만을 가지고 일으킨 분쟁이나, 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정쟁(政爭)과도 관련이 있다.

이 밖에도 갑신정변(1884)과 동학농민운동(1894)등이 있다.

문화[文化]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사관(史官)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사기(史記)이며,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 등의 과정을 거쳐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編年體,역사 기록을 연·월·일순으로 정리하는 편찬 체재.)로 기록한 책이다. 실록은 조선 태조를 시작으로 철종까지 472년간 기록을 말하며, 고종과 순종실록은 일제 치하에서 편찬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실록을 기초 하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광해군일기』의 중초본

 
조선왕조실록 [光海君日記] 중초본(中草本)이다.] 이 내용은, 광해 9년 " 인경궁(仁慶宮)의 역사를 일으키는 시초였는데, 당초에는 단지 이궁(離宮)만 짓도록 명한 것이었다."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수정해 삭제 또는 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거의 초서로 쓰여 있다.

[광해군일기 [光海君日記] 중초본은 먹 또는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수정해 삭제 또는 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거의 초서로 쓰여 있다.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2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다루었다. 187권.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 64책과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 39책의 두 종류가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대한 유산 한글편집

지금 읽는 이 한글은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 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예의(例義)

  • 어제(御製)에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해례(解例)

  •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에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가 세종의 명을 받고 한문으로 편찬한 해설서이다.(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 소장) 이를 반포하면서『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통하여 쓰기 편한 문자와 천지인(天地人)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다. 글자를 만들면서 창제동기를 밝힌 것은 한글이 유일하며 유네스코(UNESCO)가 선정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고, 정보화 시대에 전혀 문제가 안되는 표현 문자이다.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난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고 한다.
  • 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 센티미터, 세로 32.3 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한글사용을 못하도록 정한 법(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되어 2부가 존재한다. 발견 후 한글이 과학적인 글자임을 알았다.

유적[遺跡]편집

  • 세계유산 조선왕릉
  • 한양도성
  • 창덕궁을 포함한 5대 궁궐

1,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왕도인 한양(서울) 도시 계획의 중심이기도 하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 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 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고,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일원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2,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3,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4,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 이후 물밀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과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5,경희궁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 남한상성
  • 수원화성
  • 종묘
  • 수창궁(壽昌宮)이 불에타 없었다
  • 효종·현종·숙종에 걸치는 3대의 혈통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숙종의 유교(遺敎)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면, 임금인 경종 외에는 연잉군밖에 없는 셈이 된다
  •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로,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
  •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
  • 소현 세자의 이름이 李汪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