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Salamander724/광주 민주화 운동

배경 편집

1979년 10월 26일, 18년동안 독재자로 군림하던 대통령 박정희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했다. 박정희 사후 정국은 총리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승격시킨 잠정체제가 시작되었다. 이 사이 유신체제파는 공화당 총재 김종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등 ‘이것을 기회로 민주화를’ 생각하는 세력과 보안사령관 전두환 등 ‘군사독재 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졌다.[1] 한편 반체제파는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등 ‘즉각적 민주화’를 주장하는 세력과 신민당 총재 김영삼 등 ‘원만한 민주화’를 원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전두환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와 특전사령부(공수부대)를 사병으로 활용해 정승화 등 군 수뇌부를 체포하고 군 실권을 장악했다. 이어 전두환은 1980년 3월 1일에 중장으로 승진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했다. 대학생들은 전두환 그룹의 움직임을 보고 군부독재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전국적 가두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3김은 학생들의 힘을 활용해 전두환을 봉쇄하는 데 실패했다.[2]

전개 편집

5월 18일: 화려한 휴가, 피의 거리 편집

5월 18일 0시, 신군부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등 재야 정치인과 김종필 등 공화당 잔여세력을 급습, 26명의 정치인들을 동시 체포 구금했다. 두 시간 뒤,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공수특전단이 진주했다. 군인들은 16일 시위를 마치고 학교에 나와 있던 학생들을 군화발과 곤봉으로 짓이기고 대학본부 건물에 감금했다. 학생 일부는 옥상으로 기어올라 배관을 타고 탈출했다.[3]

날이 밝자 광주 시내의 모든 관공서는 경찰, 전투경찰, 일반 군인, 공수부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거리에는 지방 경찰서에서 차출된 사복경찰들이 배치되었다. 오전 9시가 넘자 일부 시민들이 경찰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같은 무렵, 대학 도서관에 간다든가, 학교에 두고 온 가방을 챙기러 간다든가, 또는 학생회 지시에 따르려는 대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는 공수부대 1개 분대가 버티고 서서 학생들을 막았다. 10시가 넘어서자 모인 학생들이 100여명이 되었다. 수가 많아지자 점점 불만의 목소리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농성을 시작했다.[4] 200 ~ 300명쯤 모이자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는 구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수부대 책임자가 나와서 해산을 명령했지만 학생들은 더욱 크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갑자기 돌격 명령이 떨어지고, 공수부대원들이 튀어나와 학생들을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곤봉은 경찰봉과 달라 쇠심이 박혀 있었다. 학생들이 피를 쏟으면서 쓰러졌다.[5][6]

이리저리 흩어졌던 학생들은 광주역전에서 모여 시민들에게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대오를 정비한 학생 3, 4백명은 금남로 도청 광장을 목적지로 ‘김대중 석방’, ‘계엄 해제’, ‘휴교령 철회’,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행진해 나갔다. 11시쯤이 되자 학생들의 숫자는 5백여 명이 되었다.[7] 길가에 시민 수천 명이 모여들었으나 감히 나서지 못하고, 군중 사이의 학생들이 합류하여 농성자는 7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농성한 지 십여 분 지나자 전투경찰들이 달려들어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때리고 차에 싣고 가 버렸다. 병력차가 압도적이라 학생들은 일시에 흩어져 버렸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골목골목에서 산발적 시위가 일어났다.[8][9] 오후 2시쯤부터 학생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3시가 되자 다시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시위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또 그에 따라 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가 파괴되는 등 시위 양상이 훨씬 공격적이고 과감해졌다. 한편 오후 1시쯤부터 수창국민학교에 공수부대의 군용 트럭 20여 대가 집결하고 있었다.[10][11]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던 시민들이 시위 학생들에게 빵과 음료수를 건네주며 격려하고, 자신들도 하나둘씩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해 시위대는 1500여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가 광주천 쪽으로 접어들자 광주공원에 모여 있던 500여 명의 학생들이 합류했다. 시위 군중은 점점 늘어나고, 시위대는 동명동 파출소를 습격해 대통령 최규하 사진을 떼어내 ‘허수아비 꼭두각시 최규하 죽여라’라며 박살냈다.[12] 5월 18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까지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이 충돌한 곳은 광주고등학교, 터미널, 한일은행, 계림극장, 청산학원, 동명동 파출소, 도교육위원회, 카톨릭센터, 충정로 파출소, 구 시청 등 15개소 이상에 달했다.[13] 이어 지산동 파출소를 박살낸 시위대는 산수동 오거리 쪽으로 가다 시위 진압에 동원되던 경찰 버스와 마주쳤다.[14] 버스를 탈취한 시위대는 부상당한 경찰 3명을 병원으로 보내고, 나머지 43명은 무장해제시킨 뒤 포로로 잡힌 대학생과 교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출현하기 시작하자 사기가 떨어진 시위대는 경찰들을 조건없이 그냥 돌려보내 버렸다.[15]

수창국민학교에 집결해 있던 공수부대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으로 투입되었고, 4시 40분경부터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시위 학생을 잡아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군화발로 머리를 으깨고 등과 척추를 으깬 뒤 얼굴을 위로 돌려 안면을 뭉개고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 그 뒤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를 멱살을 잡아 걸레 던지듯 트럭에 실었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제7공수특전단은 이때쯤 전두환의 사병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들은 살인 면허를 받은 마냥 잔인, 냉혹했다.[16] 공수부대는 서너 명이 1개 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인다 싶으면 무조건 쫓아가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군화발로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검으로 배를 쑤셨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학생이 잡히게 되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대문에 나와 있던 노인이 몸으로 가리며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노인을 곤봉으로 후렸다. 노인은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돌을 집어든 학생은 등에 총검을 맞고 길거리로 끌려 나갔다.[17][18]

한 시위학생은 북동 우체국 옆 골목으로 뛰어들어 장롱 속에 숨었다. 공수대원이 들이닥쳐 학생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집주인 노파가 모른다고 대답하자마자 곤봉으로 후려쳐 실신시키고 학생을 끌어내 곤봉으로 안면을 짓이겨 끌고갔다. 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가던 여학생을 이유없이 붙잡아 발로 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버린 뒤 피투성이로 실신할 때까지 발길질로 난타했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는 시내버스를 모조리 정차시키고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조건 끌고갔다. 학생 아닌 청년들이 반항하자 “광주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다”면서 난타했다. 버스 안내양이 반항하자 밀쳐서 차 밖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들었다. 공수대원들은 수통에 빼갈을 담고 있었고, 술기운과 살기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19]

30분 뒤 공수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여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주민들이 주저앉아 통곡을 시작했다. “일제 시대 순사들보다, 6·25 때 공산당보다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월남전에서 베트콩도 죽여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렇게 죽일 바에야 그냥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 버려야 해.” 온 거리가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20][21] 오후 5시쯤 학생들이 완전히 해산당하자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을 수색하면서 상점, 다방, 이발관, 음식점, 사무실, 가정집, 당구장 등지에 숨어 있던 학생들을 때려서 개처럼 끌고 나왔다. 오후 7시쯤 광주고등학교 근처에서 좀전의 살상극을 전해듣고 파이프, 식칼, 각목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충돌했다. 처음에는 공수부대가 열세에 빠져 도주했으나,[20] 시위대가 추격하자 반격을 가했다. 공수부대는 주위를 포위하고 산수동, 풍향동 일대를 샅샅히 뒤져 젊은이는 무조건 끌고 갔다. 밤이 되자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정보가 전화를 통해 광주 곳곳으로 퍼져나갔다.[22]

5월 19일: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 편집

19일 오전 공수부대의 만행은 절정에 달했다. 진압봉으로 패고, 총검으로 찌르고, 발가벗겨서 기합을 주고, 트럭에 짐짝처럼 실어갔다.[23][24] 붙잡혀간 사람들에게도 군화발로 얼굴을 문지르고,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고, 발가락을 총검날로 찍고, 사람이 가득한 트럭 속에 최루탄을 던지고, 마주보게 한 다음 서로 몽둥이로 때리게 하고,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을 먹이고, 화장실까지 포복시켜 혀에 똥을 묻히게 하고, 송곳으로 맨살을 후벼파고, 총검으로 살을 포 뜨고, 손톱 밑으로 송곳을 밀어넣었다.[25][26][27][28]

5월 20일: 전면적 항쟁 편집

5월 21일: 도청 점령 편집

5월 22일 ~ 25일: 혼란과 분열 편집

5월 26일 ~ 27일: 최후 항전 편집

주석 편집

  1. 이카리 아키라, 《80년 5월 광주 봄의 대학살》 23쪽
  2. 이카리 아키라, 위의 책 24쪽
  3. 황석영, 위의 책 34쪽
  4. 황석영, 위의 책 35쪽
  5. 황석영, 위의 책 36쪽
  6. 강준만, 위의 책 122쪽
  7. 황석영, 위의 책 37쪽
  8. 황석영, 위의 책 39쪽
  9. 황석영, 위의 책 40쪽
  10. 황석영, 위의 책 42쪽
  11. 황석영, 위의 책 43쪽
  12. 황석영, 위의 책 44쪽
  13. 황석영, 위의 책 45쪽
  14. 황석영, 위의 책 46쪽
  15. 황석영, 위의 책 47쪽
  16. 황석영, 위의 책 48쪽
  17. 황석영, 위의 책 49쪽
  18. 강준만, 위의 책 123쪽
  19. 황석영, 위의 책 50쪽
  20. 황석영, 위의 책 51쪽
  21. 강준만, 위의 책 125쪽
  22. 황석영, 위의 책 52쪽
  23. 강준만, 위의 책 126쪽
  24. 최정운, 위의 책 98쪽
  25.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 1990), 814쪽, 917쪽, 1011쪽, 1452쪽 ~ 1453쪽, 1483쪽
  26. 박남선, 위의 책 156 ~ 157쪽
  27. 최정운, 위의 책 259쪽 ~ 262쪽
  28. 강준만, 위의 책 128쪽

참고 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