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다문 밖의 변

에도 막부의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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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문 밖의 변 (桜田門外の変)은 1860년 3월 24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미토번의 낭인 무사들, 사쓰마번을 탈번하였던 낭인 무사 한 명이 히코네번에서 속하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을 습격하여 암살한 사건이다.

오늘 날의 사쿠라다문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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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이이 나오스케는 쇼군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신이었다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칙허를 받지 않은 채로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여 히토쓰바시파, 난키파로 쇼군 후계자 문제를 체결하였다.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해왔던 이이 나오스케에 대하여, 도쿠가와 나리아키한테의 근신처분 등으로 인해 특히 반발이 컸던 미토번에서는, 다카하시 다이치로나, 가네코 마고지로 등의 과격 낭인 지사들이 탈번하여 사쓰마번아리무라 지자에몬 등과 연락하여 사쓰마 군의 상경에 대한 의병 및 고메이 천황의 칙서를 가지고 모반을 꾀했지만 사쓰마번 내에서의 정세 변화에 의해, 양 번의 무사 합동 계획은 좌절되었다. 어디까지나 미토의 과격파가 독자적으로 다이로 습격을 단행하였고, 사쓰마에서는 아리무라 혼자 가세했다.

당일 이른 아침, 일행은 결행 전에 연회를 개최하고, 하룻밤 지낸 도카이도 시나가와 여관을 출발하여, 도카이도를 따라 나아가며 관문을 지나 후다노쓰지를 돌아 아미 고개, 신메이 고개 , 나카노 다리를 지나 사쿠라다 거리로 나와, 아타고 신사에서 기다린 뒤, 사쿠라다문 밖으로 향한다. 그리고, 에도번 저택에서 우치보리 길을 따라서 등성하는 도중의 나오스케를 에도 성 밖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했다. 이이 가에 미리 경고문이 도착했지만 이이는 굳이 호위를 강화하지 않았다.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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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묘사한 그림, 왼쪽에 머리가 찢어진 채 도주하는 사무라이

당일에는 계절과는 달리 눈으로 인해 시야가 나빠 호위무사들은 비옷을 걸치고, 칼의 손잡이에 자루를 씌워놓았기 때문에 습격하는 측에서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에도 막부가 열린 이래 막부에서는 에도 시중에서 다이묘의 가마를 습격한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히코네번 측의 방심을 불러왔다. 습격자들은 무가 연감(武鑑)을 손에 들고 다이묘의 가마를 보는 구경꾼 모습을 하면서 나오스케의 가마를 기다렸다.

가마가 가까워지면, 먼저 앞을 맡은 모리 고로쿠로가 가마 행렬의 수행원쪽으로 다가가, 붙잡으러 온 구사카베 사부로에몬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이렇게 해서, 호위 주의를 앞쪽으로 끌어들여, 구로사와 주자부로가 신호의 권총[1]으로 가마를 향해 발사하여 본대에 해당하는 가마 습격이 개시되었다. 단 권총으로 신호를 준 인물이 세키 데쓰노스케라는 설도 있다.

발사된 탄환에 의해 나오스케는 허리 부분에서 대퇴를 걸쳐 총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습격에 놀란 가마꾼은 도주하였고, 수명의 수행 무사들이 가마를 움직이도록 시도하였으나 그들 역시 베여 가마는 눈 위에 방치된다. 히코네번 무사들은 손잡이에 씌워놓은 자루가 오히려 방해되어 순간적으로 칼을 뽑을 수 없어 칼집으로 저항하거나, 맨손으로 칼을 잡아 손가락이 잘리는 등 불리한 형세였지만, 이도류를 사용하여 히코네번 이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가사이 주자에몬만은 냉정하게 비옷을 벗어 던져 씌워놓은 자루를 벗겨, 어깨띠를 걸쳐 검을 빼, 가마 옆을 지켜 이나다 주조를 쓰러뜨리는 등 습격자들을 애먹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에는 살해된다.

지키는 사람도 없어진 가마에 차례차례로 검이 찔렸다. 더욱더 아리무라 지자에몬이 문을 활짝 열어 숨이 끊어져가는 나오스케의 상투를 잡아 가마로부터 끌어냈다. 나오스케는 지면을 기어가려 했지만, 아리무라의 ‘원규[2]’와 같이, 이이의 목은 공처럼 날았갔다. 습격개시로부터 이이 암살까지는 고작 몇 분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라고 한다. 일련의 사건 경과와 극명한 모습은, 가노 호우가이작품《사쿠라다 사건 에마키》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리무라는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칼 끝에 나오스케의 수급을 찔러 위를 향해 올렸지만, 졸도하고 있던 고쇼 오가와라 히데노죠가 함성 소리를 듣고 깨어나 주군의 머리를 되찾으려고 아리무라의 후두부를 베었다. 오가와라는 히로오카 네노지로에 의해 베였지만, 아리무라도 중상으로 인해 걷기 곤란하게 되어 와카도시요리의 엔도 쓰네노리 저택의 문 앞에서 자결한다.

습격을 들은 히코네번 저택에서는 곧 사람들을 보냈지만 이미 늦었고 하는 수 없이 사상자나 가마, 선혈 투성이인 많은 손가락이나 귀가 떨어진 눈까지 회수했다. 나오스케의 머리는 엔도의 저택에 보내졌지만, 소재를 알아낸 히코네번 측이, 싸우다 죽은 번의 사무라이 중에서 연령과 체격이 가장 나오스케와 닮은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속여서, 번 저택에 전의에 의해 몸통과 꿰매어 붙였다.

사상자와 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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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자 측 중에서, 맨 처음으로 가마를 겨냥해 칼로 벤 이나다 주조는 가사이에게 베여 즉사. 아리무라 지자에몬 외 히로오카 네로지로, 야마구치 다쓰노스케, 고이부치 가나메는 히코네번 무사들의 필사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어, 다른 번 저택에 가서 자수한 뒤 할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수하거나 포박 된 뒤에 살해되거나、옥사하였다. 마스코 긴파치와 가이고 사키노스케는 잠복하여, 메이지 시대까지 살아 남았다.

이이 가 측은 이이 의외에 8명이 사망(즉사한 사람 4명, 나중에 사망한 사람 4명.)하였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의 집에서는 가독 상속이 정해졌지만, 나오스케의 호위에 실패한 생존자에 대해서는, 2년 후인 1862년에 처분이 내려졌다. 구사카리 슈고로 등 중상자는 감지된, 번의 영지였던, 시모쓰케노쿠니사노아게야에 유폐된다. 경상을 입은 자는 전원 할복이 명해졌고, 상처가 없는 자는 시분(士分, 무사의 계급)부터 가마꾼까지 전원이 참수, 가문은 절단되었다.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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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다이로가 시도했던, 막부의 정치를 세력있는 번과의 협조체제로부터 각 번과의 주도형으로 회귀시켜, 조정의 정치화를 저지하려고 하는 노선이 막 파탄되어, 막부의 권위도 실추되어 막말의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오이자카의 변에 이르기까지의, 실력행사와 무력에 의한 전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 되었다.

덧붙여, 1864년에 덴구당의 난이 일어나면, 히코네번 무사는 ‘나오스케 공의 복수’ 라고 전의를 고양시켜, 나카센도를 봉쇄하여 쓰쿠바 산에서 교토로 향한, 미토번 무사를 추격하려 했다. 하는 수 없이 덴구당은 미노에서 히다를 지나 에치젠으로 들어가, 쓰루가에서 항복했다. 다케다 고운사이 등 미토 낭인 무사 352인은 여기서 처형당한다. 또한, 히코네번 무사가 미토 낭인 무사를 처형한 형장은 라이코 사이다.

이이가의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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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공식기록으로는 “이이 나오스케는 갑작스럽게 병을 앓아, 잠시동안의 투병으로 급히 상속원을 제출하였고 서류를 수리하던 중 병사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이이가의 단절과, 그것에 의한 미토번에게로의 원한이라고 하는 전란의 격화를 막기 위한 막부에 의한 파격적인 배려였다. 이이가의 보다이 사・고토쿠 사에 있는 묘비에 사망일이 ‘3월 28일’이라고 조각되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오스케의 죽음을 은닉하기 위해, 생존을 가장해 나오스케의 이름으로 사쿠라다문 밖에서 부상을 입은 손가락이 막부에 제출되어, 쇼군가에서는 나오스케한테 보내는 병문안 선물이 번 저택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이것에 의해 많은 다이묘에게서 차례차례로 병문안의 사자가 방문했지만, 그 중에는 당사자 중 하나인 미토번에서 온 사람도 있어, 히코네번 무사들의 증오에 가득찬 시선 속에서 접대를 받았다라고 전해진다. 이이가의 떨어져 있는 영토였던 세타가야 령의 대리를 맡은 오바 가의 기록에 의하면 표면상으로 투병중인 나오스케를 위해 오바가에서는 가족이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습격한 뒤의 현장에서는 오와리 도쿠가와가 등의 후속의 다이묘 가마가 계속해서 지나가 선혈이 묻은 눈은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다이로 암살은 순식간에 에도 시중에 널리 퍼졌다.

1862년에 병사를 거느리고 상경한 시마즈 히사미쓰는,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를 추대하여 막부 정치의 쇄신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주도로 이이 나오스케의 청산을 도모했다. 그 결과, 나오스케의 측근이었던 로주 안도 노부마사를 불러 구제 히로치카를 파면하는 동시에, 나오스케의 실정을 이유로 교토수호직을 이이가로부터 박탈하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수호직에 임명했다. 또한 녹봉도 35만석에서 25만석으로 줄어들었다. 히코네번에서는, 나오스케의 심복이었던 나가노 슈젠이나 우쓰기 로쿠노죠를 참수, 방치하였지만 감봉은 면해지지 않았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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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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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때 사용된 권총은, 페리 함대가 내항할 때 막부에 증정한 미국제 콜드M1848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입수하여 번 내에서 모방하여 제조한 물건이며, 제조기술수준이 낮아 총 안에 강선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 판명되었다. 또한, 미토번의 많은 낭인지사가 습격할 때의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구전으로 그 손자가 전해주고 있다.
  2. 사쓰마번 지겐류의 특징으로 원숭이의 절규를 모방한 독특한 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