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서눌(徐訥, ? ~ 1042년 6월 13일)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서희(徐熙)의 아들이다.

생애편집

996년(성종 15년)에 과거에서 갑과(甲科)로 장원 급제하였다.

1016년(현종 7) 중승(中丞)이 되고, 1017년 형부시랑(刑部侍郎)이 되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018년 상서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尙書吏部侍郎兼左諫議大夫)를 거쳐 국자좨주 지이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를 지냈다.

딸이 고려 현종의 제6비인 원목왕후(元穆王后)가 되자 1022년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다가 차례를 건너뛰어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吏部事)로 임명되었다.

1031년(덕종(德宗) 1년) 검교태사(檢校太師)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하였다.[1]

정종(靖宗) 때에는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가 되었다. 왕이 호부낭중(戶部郎中) 유선(庾先)을 거란(契丹)에 보내어 안무(安撫)에 대한 사의를 표하려 하자, 서눌이 아뢰어 이르기를, “지난해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과 보루를 증축하고서 이제 와서 다시 화친하려고 하니, 유선이 가는 길에 표문을 부쳐 파기할 것을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1041년(정종 7년)에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고,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1042년에는 2번 표문을 올려 사직을 간청하였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서눌이 병들어 지장사(地藏寺)에서 머물렀는데, 왕이 우승선(右丞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어 문병하였고, 어의(御衣) 2벌, 곡식 1,000석, 말 2필을 사원에 시주하여 복 받기를 빌게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친히 문병하고서 제서를 내려 삼중대광 내사령(三重大匡 內史令)으로 올리고, 자손에게는 영업전(永業田)을 하사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애도하고, 간경(簡敬)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정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1086년(선종(宣宗) 3년)에 선왕(先王)의 시호를 피하여 원숙(元肅)으로 고쳤다.[2]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