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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徐禮元, ?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진주성에서 활약하다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관은 이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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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원
徐禮元
생애 ? ~ 1593년
사망지 조선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본관 이천
복무 조선군
최종 계급 진주목사
근무 곽산군수, 보을하진 첨사, 김해부사, 진주목사
지휘 조선 육군
주요 참전 임진왜란
서훈 내역 선무원종공신 1등 추록
병조참의 추증
기타 이력 무과 급제
사당 경남 진주시 창렬사(彰烈祠)

개요편집

종사랑 서형(徐詗)의 아들로 형 서선원(徐善元)과 동인의 거벽 서인원(徐仁元)이 있다.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 위의 형 서인원이 1544년 생이기 때문에 약 1545년 이후 정도로 추측된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를 하고, 곽산군수(郭山郡守)로 임명되었다. 1585년 선조 18년 회령의 보을하진첨절제사(甫乙下鎭僉節制使)로 정탐의 임무를 띠고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 땅에 깊이 들어갔으나 80여명의 부하를 모두 잃고 패주한 죄로 종성(鐘城)에 수감되었다.[1]

80명의 부하를 잃고 혼자서 살아오자 조헌서예원이 장수의 첩을 간음하여 무인들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여러 해 동안 과거 응시를 정지당하여 그의 형 서인원이 수습하여 합의한 경력을 들어 심하게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다.[2]

그 뒤 석방되어 김해부사로 있을 때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수비하던 중 적이 보리를 베어다가 성의 높이와 같게 쌓고 쳐들어오자 패주하였다.

그 뒤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의 왜적을 격퇴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왜적과 항전하여 큰 공을 세운다.

최후편집

1592년 김시민이 왜병에게 암살당하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에게 발탁되어 진주목사가 되었다. 서예원은 서인원으로 인해 특별히 발탁되어 변방(진주)의 수장이 되었다.[3]

1593년 6월 1일 교전 중 황진이 죽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무리를 이끌었다. 최경회(崔慶會)가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하여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張潤)에게 대신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도 탄환에 맞아 죽었으므로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을 응수하였다.

5월 29일 적이 진주성으로 침입을 하자, 대항하다가 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서예원의 시체에서 목이 왜군들에 의해 베어졌으며 서예원의 수급은 일본으로 보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서예원의 수급을 김시민의 수급으로 인식했다. 그의 처 이씨와 맏며느리 노씨, 시집가지 않은 딸 모두 남강에서 투신한다.[4]

사후편집

서예원은 죽은 직후 왜군들에 의해 참수되어 그 수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고 그는 서예원의 수급을 김시민의 수급인 줄 착각하였다.[5] 임진왜란 이후 서예원은 선무 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병조 참의(贈兵曹參議)로 추증되었고, 고종 때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6]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선조실록수정 18년 (1585년 12월 1일). “오랑캐가 풍산보 수호소, 회령 경계 등에 침입하다”.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19권 
  2. 선조실록수정 18년 (1586년 10월 1일). “조헌의 상소문”.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0권 
  3. “선조실록수정 25년”. 조선왕조실록. 1592년 10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6권 
  4. “선조실록수정 26년”. 조선왕조실록. 1593년 6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27권 
  5. 최 관 (2012년 2월). “『征韓録』에 대한 일고찰” (PDF). 한국일본학회: 186. 2013년 1월 19일에 확인함. 
  6. “고종실록수정 39년”. 조선왕조실록. 1902년 2월 2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42권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