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진주성(晉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
(晋州城)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진주성 정문 촉석문
종목 사적 제11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173,036m2
시대 백제, 고려 우왕 때 석성 개조
위치
진주성 (대한민국)
진주성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남성동, 본성동
좌표 북위 35° 11′ 24″ 동경 128° 4′ 24″ / 북위 35.19000° 동경 128.07333°  / 35.19000; 128.07333좌표: 북위 35° 11′ 24″ 동경 128° 4′ 24″ / 북위 35.19000° 동경 128.07333°  / 35.19000; 128.07333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진주성 내의 촉석루1604년부터는 경상우병영의 병영이었고, 1895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남관찰사부, 경북관찰사부로 나뉘면서 경상남도관찰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목차

개요편집

 
여지도(與地圖)에서의 진주목 모습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소재해 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열사,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연혁편집

진주성은 본래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백제 때는 거열성지였으며,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1]

진주성내 촉석루 근처에는 한때 경상우병영경상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경상남도관찰사로 나뉘자 경상남도관찰사부의 부청 소재지였다. 1604년(선조 37년) 마산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으로 정식 개정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도청이 있었다. 촉석루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고,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군사, 행정 기능편집

1604년(선조 37년)에는 경상남도 마산 합포에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진주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집무를 보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설치되어 조선의 군제가 신식 군대로 개편될 때까지 경상우병영의 청사 소재지였다. 또한 촉석루와 그 주변 지역은 과거 시험 또는 생원시, 진사시, 경상우도 지역의 향시를 시행하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상북도 관찰사와 경상남도 관찰사로 나뉘면서 경상남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촉석루 앞에 건립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으로 활용되었다. 경상남도 관찰사부는 촉석루와 함께 한국 전쟁 중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

훼손과 복원편집

1905년(광무 8년) 2월 10일 진주군수 이용교(李瑢敎)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자 박중양진주 판관으로 부임, 민병성이 후임 군수로 부임하는 2월 20일까지 진주군수 서리를 겸하였다.

이때 박중양은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였다.[2] 임진왜란 당시 왜병 5만 명 앞에서도 난공불락이었던 진주성은 박중양이 성첩을 팔아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촉석루 1채 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2]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 토지국은 진영 못을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그 공사에 충당해 버렸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69년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진주성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중건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을 복원하였다.

1979년 ~ 1984년까지 성내의 민가 751동을 보상비용을 주어 철거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성 외곽의 정비사업과 주변 시설 철거를 2000년까지 완료하고, 2002년에는 공북문(拱北門)을 중건하였다. 이후 사적 제 1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2차 진주성 전투편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성내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1천여 명의 의병으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도 하고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중에서도 이순신한산도 대첩, 권율행주산성대첩과 함께 3대 첩승의 하나로 꼽힌다. 일명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일본군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진공하였다. 이때 인근에 있던 박진 등의 군사가 지원했지만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함께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은 살해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부자, 고종후 등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도 일거에 학살하였다.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촉석루 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한잔 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남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으리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월 7일(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7월 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이후 논개가 투신한 자리는 의암이라고 불렀다.

주요 시설편집

진주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남강과 절벽에 지어진 진주성과의 잘 조화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진주성 내에는 정문인 촉석문과 후문인 공북문, 그리고 망루인 촉석루와 서장대, 북장대를 비롯하여 사찰로는 호국사가 있고, 사당으로는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충절의 여인 논개를 모신 의기사, 임진왜란 때 전몰한 순국영령들을 모신 창열사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명성이 높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문익점의 장인이자 베틀을 발명하여 의생활을 혁명을 일으킨 정천익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등 많은 주요 시설물들이 있다.[3]

촉석문편집

진주성의 정문 입구로 왼쪽 편 남강쪽으로는 시인 변영로의 논개 헌시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면 정면으로 바로 촉석루가 가장 먼저 보인다. 오른쪽 편으로는 호국의 종과 더불어 1592년 진주대첩의 승전과 1593년 전몰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다.

 
남강너머로 보이는 촉석루와 성곽

촉석루편집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남강가 의암바위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충광에 의해 창건되어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처음에는 장원루라고 부르다가 조선 초기 기록에 촉석루로 명명되게 된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임진왜란 중에서는 상시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서예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촉석루의 뒷쪽으로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아래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한 의암

의암편집

의암이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투신자살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인 논개기녀를 가장하여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빠져 죽은 바위로 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3년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촉석루에서 전승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논개는 촉석루 아래의 이 바위로 적장을 유인하여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정문부논개의 의기를 기려 추모비를 세웠지만 후에 훼손되어 사라졌다. 1629년 인조 7년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주에 정착을 해서 바위의 서쪽 벽면에 ‘義巖’(의암)이라고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사적비

의암사적비편집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논개를 모신 의기사

의기사편집

의기사는 충절의 여인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촉석루 뒷편으로 담을 이웃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시인묵객들이 바친 충절을 찬양한 시비들이 눈에 보인다. 입구를 들어서면, 최근 2008년 10월 1일 고증을 통해 충남대 윤여환 교수에 의해 제작되어 새롭게 봉안한 표준영정이 보인다. 의기사 간판 왼쪽으로는 일제시대 을사오적 중의 하나인 이지용을 꾸짖었던 산홍의 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다산 정약용이 쓴 촉석루 중수기가 있다.

 
쌍충각과 쌍충사적비

쌍충사적비편집

쌍충사적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임진왜란 의병장 제말의 기념비로 촉석루 뒤편 의기사 옆에 자리하고 있다. 1792년 정조 16년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리기 위해 쌍충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일제 시대에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훼손되어 비가 방치되어 있다가 1961년에 지금의 의기사 옆 자리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제말 장군은 칠원 제씨의 시조로 경상도 고성 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김해, 웅천, 정암,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공적이 조정에 장계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지만 1592년 선조 25년 성주대첩에서 전사했다.[4]

정조는 그 싸움을 《성주대첩》이라고 표현하였으며, 그 공이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에 비해 적지 않다는 평을 내렸다.[5] 제말은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의 조카 제홍록도 숙부를 따라 의병활동을 한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를 했으며, 정조는 선무공신에 추증하였고 같이 비를 세웠다.[5]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사적비와는 떨어져 있다.

 
후문인 공북문

공북문편집

관찰사감영과 경상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요 통로로 사용된 문이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위쪽으로 영남포정사가 보인다.

 
영남포정사

영남포정사편집

조선시대관찰사 감영의 정문이다. 도문화재 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에는 망미루라고 불렀고, 처음 창건은 광해군 10년 병사 남이홍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으로 건립하였고, 그 후로 경상도 우병영의 관문으로 활용되었다.

1895년 고종 32년에 8도제를 폐기하고 전국을 28부제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가 설영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다음 해인 1896년 건양 원년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자 경상남도가 설영되어 경상도 관찰사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고, 1925년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 때까지 그 문루로 영남포정사라고 이름하였다. 창원시의 용지공원에 있는 영남포정사는 이 건물을 본 따 지은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수령이하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새겨져 있고, 왼쪽 편으로는 문충공 하륜 선생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비가 서 있다. 이 문을 바로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살신성인으로 물리친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가 나타난다.

 
고려시대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경절사편집

영남포정사 왼쪽 옆에 대왕세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하륜이 태어난 곳이라는 작은 비석이 보이는데, 맞은 편 대각선으로는 진양하씨의 시조이자 고려 시대 충절의 상징이었던 하공진 공을 모신 경절사가 있다.

경절사는 고려시대 1010년 강조의 변을 대의명분으로 침입해온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협상단을 자처해 스스로 볼모가 됨으로써 연경에서 죽어간 충절의 화신 하공진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자, 하공진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거란의 제2차 침입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당사자이지만, 제1차 침입 때 알려진 서희와 제3차 거란의 침입 때 귀주대첩을 통해 알려진 강감찬 장군에 비해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바로 왼쪽 편으로는 청계서원이 있다.

 
정천익을 배향한 청계서원

청계서원편집

청계서원은 고려시대 문익점의 장인인 문충공 정천익을 모신 서원이다. 1363년 고려 시대 원나라에서 목화를 숨겨 들여온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 배양과 재배를 부탁하고, 정천익은 3년간 연구 끝에 재배에 성공한다. 이어 면화를 가공하는 물레를 고안하여 보급한 공으로 문충공의 시호를 받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청계서원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바로 오른쪽 편으로는 경절사가 있고, 뒷편으로는 북장대가 보인다.

 
북장대

북장대편집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소실된 것을 1618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내와 성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락집형 건물이다. 건물 위에는 좌측으로 인사동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비봉산이 보이며, 오른 편으로는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김수근이 설계한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편집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4년 11월 2일 개관한 국내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이다. 전시실은 임진왜란실, 두암실, 기획전시길, 영상관 등이 있으며, 현자총통, 비격진천뢰와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대완구와 중완구를 비롯하여 3,500여점의 임진왜란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은 한국의 1세대 건축가인 고 김수근이 설계를 하였고, 목탑 모양을 형상화 하였다. 1998년 국립김해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가야문화에 관련된 부분은 대폭 축소 이관되었다.[6]

 
임진왜란 순국영령을 모신 창열사

창렬사편집

창열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 진주목사 서예원 등 39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607년 선조 40년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조의 서원철폐령에도 제외된 47개소의 서원 중 하나로 당시 김시민 장군을 모셨던 충민사가 철폐되고 이곳으로 통합되었다. 진주성 정문인 촉석문의 반대쪽에 서장대 아래의 호국사 옆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상남도 시도지정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함께 순국영령을 기리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장대

서장대편집

진주성 서문의 목조팔작 기와건물 지휘장대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주성에는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 외침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위한 지휘장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서쪽의 서장대, 북쪽의 북장대, 남쪽의 남장대로는 촉석루가 있다. 남강을 따라 절벽 위에 쌓은 진주성의 서쪽 벼랑 끝에 지어져 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명명되어 있고, 규모는 작지만,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건물은 소실된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판은 1979년 은초 정명수가 다시 글씨를 다시 썼다. 정면으로 3칸, 측면 2칸의 팔자형 팔작 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이다.

 
진주성 안의 호국사

호국사편집

전통 사찰 제70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호국사와 창열사는 바로 붙어 있는 건물이며, 윗쪽으로 서장대가 있다.

 
김해김씨비각

김해김씨비각편집

호국사로 들어가는 서문을 통해 진주성을 빠져 나오면, 성 아래에 작게 지은 비각이 보인다. 이 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5호로 조선 고종 때 대제학을 지낸 김상현(金尙鉉, 1811년~1890년)의 정부인 연안차씨와 그의 아들인 김정식의 은혜를 기려 세운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어떤 일을 했길래 '베푼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움'이라는 글을 새겨 넣었을까? 당시 대한제국 말기의 진주성 안에 살던 사람들이 질병과 기아로 재난을 당했을 때,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이 공덕을 기억하기 위해 1905년1907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이 비각은 대한제국 시대의 건축양식을 알려주는 건축물로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작은 비각임에도 처마를 이중으로 연출하여 처마를 길게 뻗치록 하였다. 네 모퉁이에는 팔각의 처마 받침 기둥을 세워 전체적으로 비석을 감쌌다.[7]

진주성의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편집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와 시도유형문화재가 집합된 곳이기도 하다.[8]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3호 영남포정사문루 嶺南布政司門樓 1983년 7월 20일
4호 북장대 北將臺 1983년 7월 20일
5호 창렬사 彰烈祠 1983년 7월 20일
6호 서장대 西將臺 1983년 7월 20일
7호 의기사 義妓祠 1983년 7월 20일
8호 촉석루 矗石樓 1983년 7월 20일

진주성의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편집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1호 김시민장군전공비 金時敏將軍戰功碑 1972년 2월 12일
2호 촉석정충단비 矗石旌忠檀碑 1972년 2월 12일
3호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1972년 2월 12일
155호 김해김씨비각 金海金氏碑閣 1976년 12월 20일
353호 진주의암사적비 晉州義巖事蹟碑 2000년 1월 31일

기타편집

의암 주위에는 물이 깊고 소용돌이까지 치고 있어 위험스런 바위라는 "危巖"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논개의 원혼 혹은 서예원, 최경회, 김천일의 원혼 혹은 귀신 등이 존재한다는 풍문이 한때 돌기도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정문부가 의암 주변을 탐문하였으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의암 바위에서 논개가 열손가락 마다 반지를 끼고 왜장을 꼭 껴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죽음으로서 남편의 원수를 갚았다 하여 義를 펼친 죽음이라는 뜻의 "義巖"으로 부르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1. “진주성”. 진주시. 2008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1월 17일에 확인함. 
  2. 임철, 《통일 한국의 땅 이야기》 (동연, 1995) 93페이지
  3. “진주성 유적 소개”. 진주시. 2008년 6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1월 17일에 확인함. 
  4.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 제말”. 2008년 12월 23일에 확인함. 
  5. 조선왕조실록 (1792년 7월 25일). 《정조실록 16년, 35권》. 2008년 12월 23일에 확인함. 
  6. 국립진주박물관 안내자료, 2008년 12월 14일 확인
  7. 김해김씨비각 안내문 참조(2008. 12)
  8. 문화재청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