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찬

송석찬(宋錫贊, 1952년 1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6대 국회의원이다.

송석찬
출생1952년 1월 15일(1952-01-15) (69세)
대한민국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면 구성리 343번지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국적대한민국
거주지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
본관은진
학력명지대학교 법학과
경력6.10민주항쟁 주도로 구속
대전광역시 초대 시의원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장 민선1,2기
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대전시지부장
새천년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새천년민주당 원내부총무
새천년민주당 지방자치위원장(당4역)
노무현대통령후보 신행정수도건설 특별위원장
노무현대통령 탄핵 저지 대책위원장
부모송철용(부), 윤유봉(모)
배우자나경숙
자녀1남 2녀
군복무1978년 육군 병장 전역
소속위원회행정자치위원회(前)
의원 선수1
의원 대수16
정당무소속
지역구대전 유성구(16)
웹사이트송석찬 - 대한민국헌정회

주요 이력편집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에서 출생하였다.대전광역시 초대 대전시의원,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장 민선1,2기,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학력편집

경력편집

  • 1971년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연사
  • 민주화추진협의회 농림수산위원회 위원
  • 6.10민주항쟁 주도로 구속
  • 대전광역시 초대 시의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장 민선1,2기
  • 16대 국회의원(대전 유성구)
  • 새천년민주당 대전시지부장
  • 새천년민주당 정책부의장
  • 새천년민주당 원내부총무
  • 새천년민주당 지방자치위원장(당4역)
  • 노무현대통령후보 신행정수도건설 특별위원장
  • 노무현대통령 탄핵저지비상대책위원장
  • 월드컵지원특별위원회 간사

주요 사건편집

타는 목마름으로 국민과 함께 이룩한 민주주의 여정편집

위대한 우리 국미은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 뜨리고 10.26사태로 박정희 유신독재의 종식을 이루었지만 민주화를 꿈꾸던 서울의 봄은 5.18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한 군사독재의 한파로 무참히 짓밝히고 말았습니다. 온국민의 살얼금판을 걷던 캄캄한 암흑의 시절 민주화를 외치던 청년들을 하루아침에 군대로 끌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고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유골함을 끌어안고 한 없이 통곡하여 눈물바다를 이루었던 통탄의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아들 딸들이 피 눈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외치다 아침의 찬 이슬처럼 바람곁에 사라져 갔으며 최루탄이 난무하는 아스팔트길 위에서 백골단의 곤봉이 춤추는 골목길에서 연행되어 돌아 올길 막막한 난지도 쓰레기장과 고속도록변, 깊은 산골짜기에 버려져 캄캄한 밤길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김영삼, 김대중(김상현)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여 강력한 반독재투장을 전개하였습니다. 수 없이 연금되고, 감금되고, 구속되고,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송광영, 박종철, 이한열 민주열사의 고귀한 희생은 1987년 6.10민주항쟁으로 6.29항복선언을 이끌어 내 김영삼 문민의 정부, 김대중 국민의정부 노무현 참여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켜 찬란한 민주주의 꽃을 피우며, 위대한 한민족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편집

송석찬은 정치군인들의 손에 의해 역류하는 역사를 바로잡고, 누구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대명천지를 이룩하리라는 일념으로 신민당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추진 결성 대회장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농성장에서, 최루탄이 난무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타오르는 목마름으로 5월의 노래 님을위한행진곡을 부르며, 4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최선봉에서 투쟁했다

민주화 성전의 횃불을편집

송석찬은 1971년 김상현 국회의원의 권유로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김상현 선생님은 1984년 5월 18일, 김영삼 대통령님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한 후 1985년 1월 15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1985년 2월 12일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이르켜,  6.10민주항쟁의 진원을 만들었다.김상현 선생님은 민주화 투쟁에서 평생을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정치인은 적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통합과 포용, 화해와 조정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오셔서 정치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다. 송석찬은 1971년 4월 27일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 김대중 신민당대통령후보 비서실장 김상현 국회의원을 종로3가에 있는 한국현대웅변연설학원에서 대통령선거와 8대 국회의원 선거 준비를 위하여 학원을 자주 찾아 오신  고병현  신민당 선전부국장의 소개로 만나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함께 가자"는 김상현 비서실장의 강력한 권유로 어린 나이에 김대중 신민당대통령후보 유세반 연사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전국의 5일장을 누비며 김대중 신민당대통령후보 지원 연설을 했다 그 후 송석찬은 김상현 선생님을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면서 민주화의 동지로서 한 길을 걸어 왔다

유신의 광풍이 휘몰아친 잔인한 겨울편집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후보에게 위협을 느낀 대통령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72년 10월 17일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선포 하였으며, 유신헌법이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유신헌법이 통과되자 유신의 광풍이 휘몰아쳐 민주화를 외치던 젊은이들은 군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구타에 시달려야 했고,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지 못해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는 통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후보 선거운동을 했던 송석찬 역시 1973년 1월 추운 겨울날 군에 입대하면서 특별관리 대상자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송석찬의 군대 생활의 동반자는 이유도 없이 당해야 하는 구타와 번뜩이는 감시의 눈이었다.훈련소 입소 첫날 밤 어디론가 끌려가 몇 시간을 군홧발로 구타 당하면서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검은 그림자들이 송석찬을 에워싸 5파운드 곡괭이 자루가 빗발처럼 쏟아지고 매질은 인정사정이 없었다.수없이 맞아 쓰러지면 군홧발로 짓밟아 정신을 잃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입대한 이 나라 젊은이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암울한 시대의 비극이었다.그들은 전시도 아니건만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으로 돌아와 통한의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6.10 민주항쟁의 진원을 만든 - 민주화 추진 협의회편집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유신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 하였으나, 12.12 전두환 노태우 하나회 중심의 군사 반란으로 군사독재의 칼바람이 또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1984년 5월 18일 김영삼 대통령님과 김대중 대통령님을 대신한 김상현 선생님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한 후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6.10민주항쟁의 진원을 만들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 농수산위원이며 신한민주당 선전 문화차장인 송석찬은 선전국장 김득수 국회의원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대통령직선제 개헌추진' 현판식 행사 준비를 했다 식전과 식후 연설은 물론 때로는 사회를 보면서 우리 국민은 총궐기하여 국민을 총칼로 무참히 짓밟고 국민의 피의 능선을 타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 땅에 꽃 피워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고, 국민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송석찬은 대통령직선제개헌추진 현판식 행사가 끝난 뒤 가두행진의 최선봉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재타도, 직선개헌 을 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6월 10일 민주항쟁의 발화점 - 5ㆍ3 인천사태편집

1986년 5월 3일 인천시민회관에서 신한민주당 개헌추진위원회 경인지부 결성대회가 재야,노동자,학생,시민 등 총집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집회 후에는 가두시위도 계획되어 있었다.행사장으로 가기 전, 송석찬은 아침 일찍 동교동에 연금중이던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을 찾아뵈었다.집을 나오는 순간, 송석찬은 경찰들에게 두 팔이 뒤로 꺾인채 강제로 경찰버스에 태워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다행히 현장을 목격한 동지들과 시민들이 차 앞을 가로막았고, 송석찬을 구출하기 위해 송천영 국회의원이 차 안으로 뛰어 들어 연행을 막았다.그런 와중에도 송석찬은 정신을 수습하고 인천의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그곳 역시 심각한 상황이었다.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예상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행사장 주변에 경찰로 하여금 이중 삼중의 경계망을 펼쳐 놓은 상태였고, 도로를 차단한 채 진입을 시도하는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마구 발사하고 있었다. 다행히 송석찬은 경찰의 눈을 피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 대회장 안을 가득 메운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종식"을 외치고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다 송석찬의 외침은 행사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서 옥외에 설치한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먼 곳까지 물결쳐갔다. 송석찬 식전 연설이 끝나갈 무렵,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군사독재정권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시민들이 꽉 찬 행사장 안에 소나기 같은 최루탄을 쏟아 부었다.순식간에 콧물, 눈물, 비명소리로 뒤범벅이 된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로 인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5.3사태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하나 된 함성이 메아리치던 6.10항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6월 10일 민주항쟁 -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될 민중의 함성편집

1987년 6월 10일  6.10민주항쟁은 우리 민족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위대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민주화의 열망을 안고 최루탄 가스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운 6.10민주항쟁의 역사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6ㆍ29 항복 선언을 얻어낸 성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그것은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전국민이 하나로 뭉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항쟁으로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될 민중의 함성이었다.사전에 6.10민주항쟁의 중심지로 성공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예상한 정부는 거사 3일 전인 6월 7일부터 성공회 외각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송석찬은 6월 9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의장 양순직 선생님, 김현수 국회의원, 한영애, 신의철과 함께 조선일보사로 들어가 서로 도움을 받아 대한성공회 수녀원의 담을 넘어 지붕을 타고 뛰어 내렸다.우여곡절 끝에 대한성공회 잠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은 성공회 진입을 막기 위해 새벽부터 전투경찰을 동원해 경계를 강화했다.

6.10민주항쟁의 진원지 대한성공회편집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대한성공회 종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그 소리는 길고 긴 세월, 노예적 굴종과 침묵의 삶을 강요당해 온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 일어나 국민이 역사적 주인임을 선언하는 6ㆍ10민주항쟁의 서곡이었다.대한성공회 박종기 신부님의 안내로 사상 최초로 잿빛승복을 입고 대한성공회 종탑에 오른 지선스님과 진관스님, 여류 소설가 유시춘, 김병오, 송석찬은 분단과 독재의 세월을 뜻하는 마흔 두 번의 장엄한 종소리로 6ㆍ10민주항쟁 국민대회의 시작을 알렸다.종탑에 오르기 전 잿빛 승복의 지선스님과 진관스님은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애절한 기도를 하였다.무심으로 신을 구하던 스님이 신부님들만의 공간에 동참해 속세의 번뇌를 함께 나누는 모습은 보는 이를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아이러니컬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비록 교리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추종하는 절대자가 다르다 하더라도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 몇 배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우리 나라 종교만이 갖고 있는 역동성이었다.아마도 지선스님과 진관스님 그리고 유시춘 여류소설가는 성당 종탑에 올라간 최초의 스님과 여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종탑에 설치한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국민 여러분!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간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무효임을 선언합니다.라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의장인 지선스님의 카랑카랑한 선언문 낭독에 이어 김병오, 유시춘, 진관스님, 송석찬은 서울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과 주변 건물, 그리고 대한성공회를 이중삼중으로 에워싼 진압복 차림의 경찰을 향해 모든 국민은 오늘 오후 6시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손에 손을 잡고 거리로 거리로 나와 총궐기하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모든 차량은 경적을 울려 군사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아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 피워 국민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반복해서 호소하였다.그리고 오후 6시 정각.대한성공회 종탑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성당 종탑에 오른 진관스님과 송석찬은 오전에이어 6.10민주항쟁 대회를 시작하는 종을 또다시 울렸다.종소리와 함께 대한성공회 밖의 차량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리기 시작 했고, 시민들이 외치는 '독재타도'의 함성과 함께 최루탄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6.10민주항쟁 대회는 예정된 순서에 따라 두 시간 동안 진행되어 12개 단체의 결의문 낭독을 마치고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6.10민주항쟁 주도한 핵심 민주인사 13명구속편집

집회를 마치고 성공회 밖으로 나가던 김명윤 상임공동의장과 유시춘 등 대부분의 인사들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6.10대회를 주도한 핵심 인사들을 연행하기 위하여 경찰이 밤새도록 대한성공회를 에워쌌다. 6월 11일 경찰은 민주인사들의 강제연행을 위해 성공회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각 언론사에서는 역사적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부터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6.10대회를 주도한 민주인사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그러니 죄인을 호송하는 경찰 호송버스에는 탈 수 없다'며 스스로 성공회에서 제공한 운전사 없는 소형버스에 올라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하도록 안에서 문을 잠그고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차 유리창을 깨고 강제 연행을 실행하려던 경찰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견인차를 불러 민주인사들이 타고 있는 차를 견인하기 시작했다.상상해 보라, 전시도 아니고 국빈 행렬도 아닌데, 운행중인 모든 차량을 도로변에 대피시키고, 신호등까지 점등으로 바꾼 서울시청 앞 대로에서 사람을 태운 채 견인되는 봉고버스를 그리고 그를 호송하는 백차와 경찰 오토바이, 그 뒤를 따라가는 수 십대의 취재 차량들의 행렬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의장인 양순직 통일민주당 부총재, 김명윤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계훈제 민통련의장, 박형규 목사, 지선 스님 제정구선생, 상임집행위원장 오충일 목사, 총무분과위원장 진관스님, 홍보분과위원장 김병오, 상임집행위원 유시춘, 상임집행위원 이규택, 집행위원 금영권 목사,통일민주당 농수산부장 송석찬은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되어 강동경찰서, 성동경찰서 유치장 등에 수감되어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고, 내란음모, 국가전복, 6.10 대회주도, 전국시위주도, 급진좌경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10옥사)에 구속되었다.정부는 이들을 구속하면서 "지금까지 2.7대회, 5.3사태 등의 경우 중심부 인사들은 건드리지 않고 주변부의 말단행동책들만 구속하는 물량주의 방식이었지만 중심부인사들이 마치 치외법권지역에 있는 양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해 대규모 시위행위가 근절되지 않아 소수정예주의로 방침을 바꿔 중심부 인사들을 구속하게 된것"이라고 밝혔다.[한국일보 외]

6.10민주항쟁 - 참혹한 암흑의 시대 청산편집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대공분실에서의 고된 심문을 마치고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송석찬은 독립투사들과 정치범들이 수감되던 10동 26호에 수감되었다.일제 36년 치하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잃어버린 주권과 빼앗긴 강토를 찾기 위해 이억 만리 이국 땅 이름 모를 계곡에서 온 몸을 던져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던 독립 투사들의 결의에 찼던 눈빛들을, 해방과 더불어 조국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 뿐 오히려 정적으로써 사지를 묶인 채 불렀을 민주화 동지들의 통한의 노래를, 그리고 위정자가 바뀔 때마다 정치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오고 갔던 투혼들이 쏟아낸 정의의 눈물을, 이 방은 모두 보고 들었으리라.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서대문 형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공원과 주거공간인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독립투사들과 정치범 민주인사들이 수감되었던 10동 건물은 허물지 않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되어 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13명이 구속되자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등 80여명의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맡았다.

6.10민주항쟁의 주역 - 지역감정 극복하고 당선편집

송석찬은 1991년 6월 20일, 30년 만에 부활된 대전직할시(대전광역시) 시의원선거에서 대전직할시장직을 사임하고 출마한 거대여당(노태우 대통령 김영상 총재 김종필 총재 합당)후보인 이봉학 시장을 누르고 당선되었고, 민선 1ㆍ2기 유성구청장,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충청권에 불어댔던 김종필 총재의 녹색바람을 잠재우고 민주당 교두보를 확보하여 전국적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요 업적편집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 실시편집

1995년 유성구청장 재직 시 학교 급식시설비를 지원해주지 말라는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최초로 초ㆍ중ㆍ고등학교에 학교급식시설비를 지원하여 학교급식을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도시락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오늘날 무상급식시대를 열었다. [대전일보 외]

전국 최초로 직장 보육시설 운영편집

1996년 유성구청장 재직 시 전국에서 최초로 유성구청과 대덕연구단지에 직장 보육시설을 개설ㆍ운영하였고, 민간인에게 어린이집 시설비를 지원하여 보육시설을 확대시켜 학부모들의 과중한 보육비 부담을 덜어주었다.

정보화 시대를 앞당기다편집

유성구청장 재직 시 전국에서 최초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 등ㆍ초본. 지적도면 등 모든 민원서류를 전산화하여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민원증명무인자동발급기를 설치하여 운영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는 정보 강국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토요일을 휴일로 하는 주5일근무시대를 열다편집

2002년 1월 5일 16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선진국 진입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주5일근무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여 관철시켰다. 주5일근무제는 송석찬의원이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과 그 후 정부가 제출한 개정안을 병합 심의한 결과를 16대 국회가 통과시킴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 주5일 근무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중앙일보 외]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88년 총선 13대 국회의원 충남 대전시 서구 평화민주당 8,880표
8.59%
4위 낙선
1991년 지방 선거 1대 시의원 대전 유성구 제1선거구 신민주연합당 4,805표
30.8%
1위   초선
1995년 지방 선거 5대 구청장 대전 유성구 민주당 20,764표
42.5%
1위   초선, 민선 1기
1998년 지방 선거 6대 구청장 대전 유성구 새정치국민회의 25,416표
58.7%
1위   재선, 민선 2기
2000년 총선 16대 국회의원 대전 유성구 새천년민주당 20,971표
35.23%
1위   초선
2012년 총선 19대 국회의원 대전 유성구 자유선진당 19,962표
15.91%
3위 낙선

외부 링크편집

전임
이세호
제5·6대 유성구청장
1995년 7월 1일 ~ 2000년 2월 11일
후임
(권한대행)김상원
(재보궐)이병령
  전임
조영재
제16대 국회의원(대전 유성구)
2000년 5월 30일 ~ 2004년 5월 29일
새천년민주당무소속자유민주연합무소속새천년민주당무소속열린우리당
후임
이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