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체(荀彘, ? ~ 기원전 108년)는 전한 중기의 군인으로, 태원군 광무현(廣武縣)[1]사람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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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게 말을 모는 것으로 인하여 천자를 알현하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갔다. 원봉 3년 (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쳤으나 공(功)이 없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을 체포함으로 인하여 법에 따라 죽었다.[2][3]

원봉 2년(기원전 109년), 무제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치기로 하고,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냈다. 양복은 옛 제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순체는 요동에서 나왔다. 이에 대항하여,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좌장군 순체는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4]

한 무제의 사자 위산(衛山)의 화친 제의가 실패한 후,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5]

한 무제는 누선장군·좌장군, 두 장수로는 전황이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위산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사자를 뵙고 우거는 머리를 땅에 닿도록 꾸벅이며 사죄하여 말하기를, “항복을 원하였으나, 두 장수께서 사술을 써서 저를 죽이실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만한 징표를 뵈옵고, 항복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태자(太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쳤고, 또한 군량(軍糧)를 보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이 마땅히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와 좌장군이 사술을 써서 그를 죽이지 않을지 아닐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한 무제에게 이를 알리니, 한 무제가 위산의 목을 베어 죽였다.[6]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위만조선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왕검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7]

좌장군은 원래 시중(侍中)이었고,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연나라대나라의 병졸을 거느렸고, 사나웠으며, 승세를 타고 있었고, 그의 군사들은 많이 교만했다.[8] 반면에, 누선장군 양복은 우거와의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체가 위만조선을 급하게 치니, 위만조선의 대신(大臣)은 이에, 몰래 아랫사람을 시켜 양복에게 항복을 약속하였고 왕래하며 논의하였으나, 여전히 긍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누선장군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을 기약하였으나, 누선장군은 급하게 그 조선대신과의 약속을 성취하려 하였으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아랫사람을 시켜, 그 사이, 위만조선을 물리치고 항복시키려 했으나, 위만조선은 수긍하지 않았고, 위만조선 대신의 마음은 누선장군을 따랐다. 이런 이유로 두 장수는 서로 협력이 불가능했다. 좌장군의 마음 속에는 누선장군이 예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다는 사실이 있었고, 지금 조선과 사사로이 친하니, 또한 위만조선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그 어떤 배반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 무제가 이르기를, “장수들이 능력이 없어 예전에 위산을 보내어 우거를 항복하도록 회유하자, 우거는 태자를 보냈다. 위산이 행하였으나,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었고, 좌장군과 일을 꾀하였으나, 서로 그르쳐, 마침내 약속을 깼다. 지금 두 장수가 성(城)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또한, 서로 맞지 않고 달라서, 오래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한 무제는 이를 바로잡게 하려고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편의를 가지고 이로써 일을 맡기에 이르렀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이르기를, “조선이 당연히 항복하여야 함이 오래이나, 항복하지 아니함에는 어떤 정황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순체가 누선장군에게 여러 차례 기약을 말하였으나, 누선장군과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원래 뜻하던 바에 의하여 일일이 공손수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와 같이 취하지 아니하니,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장군은 혼자가 아니고 또한, 장차 조선과 함께 우리 군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수 역시 이를 그렇다고 여기고 나서, 부절(符節)로서,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에 들어 오도록 소환하여 일을 꾸몄다. 즉, 좌장군 휘하에게 누선장군 및 그의 군사(軍士)의 체포를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한 무제에게 보고하자, 한 무제는 공손수를 죽였다.[9]

좌장군은 그 후 양군(兩軍)을 아울러 위만조선을 급히 쳤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사이, 왕검성에서는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병권을 장악했으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最)를 시켜 그 백성을 하소연하고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이로써 마침내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10]

그 뒤, 좌장군 순체는 전쟁에서 공(功)을 다투고 누선장군 양복과 서로 질투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시되었다.

순체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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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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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의 山西 代縣 서남방
  2. 사마천(기원전 1세기),《사기》〈권11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 “장군(將軍) 순체(荀彘)는 태원(太原) 광무(廣武)사람이다. 뛰어나게 말을 모는 것으로 인하여 천자를 뵙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교위(校尉)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大將軍)을 따라갔다. 원봉 3년 (기원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朝鮮)을 쳤으나 공(功)이 없었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을 체포함으로 인하여 법에 따라 죽었다.” / “將軍荀彘,太原廣武人。以御見,侍中,為校尉,數從大將軍。以元封三年為左將軍擊朝鮮,毋功。以捕樓船將軍坐法死。”
  3. 사마천 〈권115〉“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
  4. 사마천 〈권115〉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 “天子募罪人擊朝鮮。其秋,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左將軍荀彘出遼東:討右渠。右渠發兵距險。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敗散,多還走,坐法斬。[...]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自前。”
  5. 사마천 〈권115〉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 /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6. 사마천 〈권115〉 “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내, 위산(衛山)을 보내어 군대의 위엄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일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뵙고 우거는 머리를 땅에 닿도록 꾸벅이며 사죄하여 말하기를, “항복을 원하였으나, 두 장수께서 사술을 써서 저를 죽이실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만한 징표를 뵈옵고, 항복하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태자(太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쳤고, 또한 군량(軍糧)를 보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패수를 막 건너려 하자, 사자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이 마땅히 무기를 소지하지 말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와 좌장군이 사술을 써서 그를 죽이지 않을지 아닐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이를 알리니, 천자가 위산의 목을 베어 죽였다.”/“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恐兩將詐殺臣;今見信節,請服降。」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人眾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7. 사마천 〈권115〉“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우거가 마침내 수개월을 견고하게 지켜내니 능히 없애지를 못했다.”/“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右渠遂堅守城,數月未能下。”
  8. 사마천 〈권115〉 “좌장군은 원래 시중(侍中)이었고,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연(燕)과 대(代)의 병졸을 거느렸고, 사나웠으며, 승세를 타고 있었고, 그의 군사들은 많이 교만(驕慢)했다.”/“左將軍素侍中,幸,將燕代卒,悍,乘勝,軍多驕。”
  9. 사마천 〈권115〉 “좌장군이 이를 급하게 치니, 조선의 대신(大臣)은 이에, 몰래 아랫사람을 시켜 누선장군에게 항복을 약속하였고 왕래하며 논의하였으나, 여전히 긍정적으로 결정(決定)하지 못하였다. 좌장군은 누선장군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을 기약하였으나, 누선장군은 급하게 그 조선대신의 약속을 성취(成就)하려 하였으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좌장군 역시 아랫사람을 시켜, 그 사이, 조선을 물리치고 항복시키려 했으나, 조선은 수긍(首肯)하지 않았고, 조선 대신의 마음은 누선장군을 따랐다. 이런 이유로 두 장수는 서로 협력이 불가능했다. 좌장군의 마음 속에는 누선장군이 예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다는 사실이 있었고, 지금 조선과 사사로이 친하니, 또한 조선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그 어떤 배반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천자가 이르기를, “장수들이 능력이 없어 예전에 위산(衛山)을 보내어 우거를 항복하도록 회유(誨諭)하자, 우거는 태자(太子)를 보냈다. 위산(衛山)이 행하였으나,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었고, 좌장군과 일을 꾀하였으나, 서로 그르쳐, 마침내 약속을 깼다. 지금 양(兩) 장수가 성(城)을 포위하고는 있으나 또한, 서로 맞지 않고 달라서, 오래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천자는 이를 바로잡게 하려고 제남(濟南) 태수(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편의(便宜)를 가지고 이로써 일을 맡기에 이르렀다.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이르기를, “조선이 당연히 항복하여야 함이 오래이나, 항복하지 아니함에는 어떤 정황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누선장군에게 여러 차례 기약(期約)을 말하였으나, 누선장군과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고, 원래 뜻하던 바에 의하여 일일이 공손수(公孫遂)에게 고(告)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와 같이 취하지 아니하니,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장군은 혼자가 아니고 또한, 장차 조선과 함께 우리 군을 멸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수 역시 이를 그렇다고 여기고 나서, 부절(符節)로서, 누선장군을 좌장군 진영(陣營)에 들어 오도록 소환(召喚)하여 일을 꾸몄다. 즉, 좌장군 휘하(麾下)에게 누선장군 및 그의 군사(軍士)의 체포를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左將軍急擊之,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往來言,尚未肯決。左將軍數與樓船期戰,樓船欲急就其約,不會;左將軍亦使人求閒卻降下朝鮮,朝鮮不肯,心附樓船:以故兩將不相能。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疑其有反計,未敢發。天子曰將率不能,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右渠遣太子,山使不能剸決,與左將軍計相誤,卒沮約。今兩將圍城,又乖異,以故久不決。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有便宜得以從事。遂至,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具以素所意告遂,曰:「今如此不取,恐為大害,非獨樓船,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為然,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即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并其軍,以報天子。天子誅遂。”
  10. 사마천 〈권115〉 “좌장군은 그 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양군(兩軍)을 아우른 즉, 조선을 급히 쳤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상 한음(相韓陰)·니계 상 참(尼谿相參)·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참여하여 일을 꾸며 이르기를, “당초에 누선장군에게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지금 잡혀있고, 홀로 좌장군이 아우르고 거느리니, 전쟁은 점차 급해지고 있고, 더불어 싸우지 못할까 두려운데, 왕은 또한 항복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 ”하였다. 한음·왕겹·노인은 모두 도망쳐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道中)에 죽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 상 참은 아랫사람을 시켜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검성(王險城)이 항복하지 않으니, 고(故)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한 모반하여, 다시 벼슬아치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을 하소연하고 타일러, 성기를 죽이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이 되었다.” / “左將軍已并兩軍,即急擊朝鮮。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曰:「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并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陰、唊、路人皆亡降漢。路人道死。元封三年夏,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為四郡。”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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