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트뤼그 카흐

시그트뤼그(고대 노르드어: Sigtryggr), 게일어로는 시트리크 카흐(아일랜드어: Sitric Cáech, ? ~ 927년)는 10세기 초 더블린요르비크를 지배한 바이킹 지도자이다. 이바르의 손자로서 이바르 왕조의 일원이다. 시그트뤼그는 902년 에린의 게일인들에 의해 바이킹 노르드인들이 더블린에서 쫓겨났을 때 도망간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으며, 그 이후 잉글랜드데인라그 동부에 영지를 갖고 살았다. 917년, 시그트뤼그와 그의 일가붙이 뢰근발드 우어 이바르는 각각 함대를 이끌고 에린 땅에 도래하여 현지인 왕들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시그트뤼그는 더블린을 탈환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했으며, 뢰근발드는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요르비크 왕이 되었다. 919년, 노르드인들을 에린에서 다시 축출하기 위해 게일인 군주들의 동맹이 형성되어 아흐 클리어흐 전투가 벌어졌고, 시그트뤼그가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북이넬의 상급왕(rí tuath; 3-4개 정도의 왕을 하위에 거느린 왕)이자 에린의 지고왕니얼 글룬두브를 비롯해 여섯 명의 게일인 왕이 죽었다.

920년 시그트뤼그는 더블린을 떠나 노섬브리아, 즉 요르비크로 갔고 일가붙이 구드뢰드 우어 이바르가 더블린 왕위를 이어받았다. 같은 해 시그트뤼그는 체셔 데이븐포트를 공격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인 군주 에드워드 장형왕(앨프리드 대왕의 장남)에 대한 방어행동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921년 뢰근발드가 죽자 시그트뤼그가 요르비크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군사분쟁이 있었다는 문헌상의 기록은 없지만, 화폐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후 몇 년에 걸쳐 바이킹 세력이 머시아의 대부분을 재정복했다. 노섬브리아의 바이킹 노르드인과 남쪽의 앵글로색슨인은 926년 강화를 맺었고 시그트뤼그는 애설스탠의 누이(아마 성녀 에디스로 추측)와 결혼했다. 또 시그트뤼그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도로 노르드 신화 신앙으로 재개종했다. 시그트뤼그는 927년 사망했고 구드뢰드 우어 이바르가 왕위를 이었다. 시그트뤼그의 아들들 중 구드뢰드 시그트뤼그손은 나중에 더블린의 왕이 되었고, 하랄드 시그트뤼그손은 리머릭의 왕이 되었고, 올라프 크바란은 더블린과 요르비크의 왕을 겸했다.


이바르 우어 이바르
제7대 더블린 국왕
917년–920년

구드뢰드 우어 이바르

뢰근발드 우어 이바르
제10대 요르비크 국왕
921년–927년

구드뢰드 우어 이바르

뢰근발드 우어 이바르
제2대 밝은 이방인과 어두운 이방인의 왕
921년–927년

구드뢰드 우어 이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