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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申肅, 1885년 ~ 1967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가평(加平) 출신이다.

생애편집

경기도 가평 출신인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시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는 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는 데 참여하여 각 지방에 배포하였으며, 1920년 4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천도교 대표로서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요인인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협의를 하였으며, 박재혁(朴在赫)을 국내에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였다. 1920년 12월 22일 상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의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21년 북경(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5월에는 국내통일당 대표로서 천진(天津)민중대회에 참석하여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1923년 1월 내외 각 단체대표 140여인이 모여 회의가 개막되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의 탈퇴로 와해되자 윤해(尹海)가 의장으로, 그가 부의장으로 당선되어 전열을 재정비하고 의사를 진행하였으나 역시 별무성과로 회의가 파탄되었다. 1924년 만주 교하(蛟河)의 농촌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강종리원(拉法講宗理院)을 설립하고 학생 지도와 농촌계몽 및 교리 전파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6년 10월에는 중동선빈현 이도하자(中東線賓縣二道河子)의 삼청궁농장(三淸宮農場)으로 옮기고, 1927년 2월에는 송봉산(松峰山)의 개간농장으로 이주하여 신창학교(新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빈현(賓縣)과 쌍성현(雙城縣)지방의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쌍빈지방(雙賓地方) 자치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으며, 신민부(新民府)의 요청으로 정의·신민·참의 3부 통합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30년 북만에서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동당 총무위원장·문화부장 등으로 활약하였고, 1931년 동북사변이 일어나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쌍성현 공략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서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에 파견되어 국민당 정부와 군사적인 협력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935년 말 영구(營口)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1936년 초에 석방되었다. 1945년 하얼빈에서 오광선(吳光鮮) 등과 같이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해 조직된 길림한국인회의 위원장에 당선, 피난민의 구제와 귀국의 알선 등으로 교포의 권익 보호에 진력하였다.[1]

사후편집

참고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