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칼리파국의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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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칼리파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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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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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년까지의 초기 이슬람 팽창을 나타낸 지도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는 정통 칼리파 시대가 열렸다. 대략 30년 동안 지속된 정통 칼리파 시대는 제 4대 칼리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시리아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아위야 1세와 맞서던 중 암살당하고, 뒤를 이은 하산 이븐 알리가 그에게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다.

 
720년 무렵의 우마이야 칼리파국 영토.

이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를 칭하며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고, 곧 정통 칼리파 시대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하여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건국하였다. 무아위야 사후 잇달아 즉위한 우마이야 칼리파들은 제 2차 피트나로 인해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극복하고 주변 지역에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여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심지어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뻗어나감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슬람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인들만의 제국"이라는 초기 이슬람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정복지의 토착 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더라도 마왈리로 취급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비무슬림이 납부해야 하는 지즈야를 계속 납부해야 했다. 왕조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는데, 심지어 우마이야 칼리파들은 마왈리들이 도시 중심지에 거주할 수 없도록 하거나 아랍인과 결혼하는 것 역시 금지시켰으며, 아랍 양식의 의복을 착용하는 것 역시 엄격히 규제를 두는 등 아랍인과 비아랍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여럿 추진하였다. 게다가 이들 치하에서는 시아파조로아스터교 역시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이는 많은 이들이 우마이야 당국에 큰 반감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칼리파국 내 무슬림 비율은 10%가 채 되지 못했으며, 지배층인 아랍인들로만 한정한다면 그 비율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아랍인 차별 정책을 폈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740년대부터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744년에는 우마이야 왕조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나면서 약 3년 동안 중동 전역에서 맹위를 떨친 제 3차 피트나가 발생했다. 그 다음해에는 알리를 추종하는 카와리지파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당시 우마이야 칼리파 마르완 2세는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시리아 군대를 제국 전역으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앙 정부의 군대를 사방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제국이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에 매우 취약해지도록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부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바스 가문이었다.

아부 알 아바스(75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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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와 혁명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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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알 아바스를 그린 벽화

아부 알 아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 아바스 이븐 압둘 무탈리브의 고손자이자 하심 씨족(쿠라이시족의 하위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일찍이 그는 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부친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를 따라 호라산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여러 이슬람 학자들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학문을 익혔다.

743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의 형 이브라힘이 아바스 가문의 수장이 되었으나, 2년 뒤 카와리지파 반란에 가담했다가 피살당하고 말았다. 또 다른 이복 형제 아부 자파르는 모친이 비천한 출신이었기에 아부 알 아바스가 새로운 수장으로 등극했고, 그는 곧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조직적인 반란을 계획하는 데 착수했다.

기존의 서구 역사학자들은 아바스 혁명이 아랍인이 주도하는 이슬람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발의 결과라고 해석했으나, 실제로는 페르시아인들 뿐만 아니라 시아파 아랍인·시아파 비아랍인·수니파 아랍인·수니파 비아랍인·심지어 비무슬림들까지 가담한 초종파, 초종교적인 반정부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비무슬림인들, 그 중에서도 콥트인아시리아인 등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슬람 성립 이전부터 로마 제국(395년 이후 동로마 제국)과 활발히 교류하여 막대한 부와 지식을 축적해온 계층이었는데, 이들의 지지는 아바스 가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바스 가문은 종교·민족을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워 수많은 비무슬림인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마드의 친지들을 보여주고 종말론적·구세주론적인 선전을 체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샀다. 미국의 이슬람 역사학자 이라 라피두스에 따르면, "아바스의 반란은 당시 메르브에 있던 아랍계 정착민들, 그 중에서도 주로 예멘의 부족들과 대다수의 마왈리들에게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그들은 체계적인 선전 센터를 두고 별도로 담당자를 임명하여 관리하였으며, 철저하게 반란 여부를 비밀에 부쳤다.

우마이야 시대에 일어난 대부분의 반란들은 주로 중앙 정부의 모순을 지적하며 인기를 획득한 대중 운동가와 지방 토호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형태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자연히 그 이전부터 당국의 감시 하에서 미리 발각되기 일쑤였다. 아부 알 아바스는 이를 반면 교사로 삼아 계획 초기부터 모든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였는데, 우마이야 당국이 하심 씨족과 아바스 가문의 접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 자신 역시 호라산과 이라크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대중들에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아바스 칼리파국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부 무슬림의 신원 역시 은폐되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가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바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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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년, 호라산의 메르브에서 라마단 기간 도중인 6월 9일에 수많은 군중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스크로 모였다. 아부 알 아바스와 아부 무슬림은 이 때를 틈타 군중들을 선동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호라산을 통치했던 우마이야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가 즉각적으로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그는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데다가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나스르 사후 호라산의 우마이야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아바스 반란군은 이듬해 2월까지 호라산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아바스 반란군은 749년 봄까지 페르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데 성공했고, 곧 이라크로 진격하여 여러 요충지들을 잇달아 공략했다. 그해 11월 28일, 쿠파에 입성한 반란군은 지도자 아부 알 아바스를 새로운 칼리파로 선포했다. 그제서야 그는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국기이자 상징인 흰색 깃발에 대항하여 검은색 깃발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시 우마이야 칼리파 마르완 2세는 이집트에서 발발한 콥트교의 반란 진압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 가문이 쿠파까지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장 이집트에서 철수한 뒤, 휘하의 전 병력을 규합하여 이라크로 진격했다. 마침내 750년 1월 25일, 티그리스 강의 북부 지류인 대 자브 강에서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아바스 반란군과 우마이야 왕조군이 격돌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이 전투에서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참패를 면치 못했고, 약 300여 명에 달하는 우마이야 왕족들이 모조리 전사했다.(자브강 전투)

마르완 2세는 황급히 피신하여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였으나, 주민들이 그의 입성을 거부하자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향했다. 그 사이, 아부 알 아바스는 신속하게 그를 추격하여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우마이야의 지배에 순종했던 인사들을 대거 처형하고 제국 전역을 장악했다. 마침내 750년 8월 6일, 마르완 2세가 아바스 추격대에게 붙잡혀 처형당함으로써 아바스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아바스 칼리파국 건국과 몇몇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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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기 아바스 칼리파국의 영토

마르완 2세의 수급은 쿠파로 보내져서 공개적으로 효수되었으며, 에리트레아 일대로 피신하여 저항을 이어가던 그의 아들 압둘라와 우바이둘라 역시 몇 달 후에 전사하면서 마침내 아바스 가문의 권력 장악이 완료되었다. 이리하여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89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아부 알 아바스가 건국한 아바스 칼리파국이 들어섰다. 오늘날 학자들에게 이것은 이슬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환점 중 하나였다고 종종 여겨지기도 한다.

이후 아부 알 아바스는 아직까지 생존해 있던 우마이야 왕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당신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장해줄테니, 내가 초대하는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시오.

라고 말하며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는, 첫 번째 차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들 전원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아부 알 아바스는 그들의 시체 위에 카펫을 깔도록 한 뒤 부하들과 함께 그 위에 앉아서 식사를 마저 즐겼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때 그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아바스의 추격대를 피해 마그레브 방면으로 피신했고, 제국의 가장 서부인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여 754년 후우마이야 토후국을 창건했다.

그 뒤 우마이야 잔당들이 이라크의 마지막 우마이야 총독인 야지드 이븐 우바이라 알 파자리를 중심으로 항전을 이어갔으나, 아부 알 아바스는 충성 맹세를 미끼로 그들이 항복하도록 한 뒤 나중에 긴급 체포하여 모조리 처형함으로써 잔존 세력 소탕 역시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한편,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의 군대가 751년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를 침공했다. 이에 당시 아바스 호라산 총독이었던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출진하여 탈라스 전투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비슷한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가 테오도시오폴리스(에르주룸)과 멜리테네(말라티야)를 공략하여 수많은 주민들을 대거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끌고 갔다. 당시 아바스 군대는 우마이야 잔당들을 토벌하던 중이었기에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는 못했다.

이후 아부 알 아바스는 칼리파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4년 동안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우마이야 왕조의 비아랍인 차별 정책과는 반대되는 관용 정책을 펼쳤으며, 유대인,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 페르시아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을 출신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 따라 기용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교육이 널리 장려되었는데, 이것은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 도입된 제지 기술 덕분이기도 했다.[출처 필요]

알 만수르(75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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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진압과 내부 안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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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기록에서 그려진 알 만수르의 초상화

754년 6월 10일, 아부 알 아바스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자, 그의 이복 형제였던 아부 자파르가 '신의 도움을 받은 정복자'라는 뜻의 알 만수르를 칭하면서 즉위했다.[1] 그러나 그는 재위 초기부터 큰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바로 시아파가 자신들이 선출한 이맘이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며 그의 칼리파 즉위에 거세게 반발했던 것이다.

이에 알 만수르는 아바스 가문의 칼리파직 세습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여겨지는 주변 세력들에 대해 단호하게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그는 건국 공신이었던 아부 무슬림을 은밀히 제거하였으며, 시아파 지도부를 반역죄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체포하여 처형시켰다. 이후 시아파 인물들을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그 자리에 아바스 왕족이나 비아랍계 무슬림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에 분노한 아부 무슬림의 추종자들과 시아파가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역시 진압군에게 패퇴당하면서 알 만수르의 권력 장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바그다드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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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불안정하던 제국의 기반을 공고하게 다진 알 만수르는, 반란 진압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국의 내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치세에 여러 업적들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그다드의 건설이었다.

알 만수르는 치세 초기에는 쿠파에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반란 세력의 준동과 내부 결속력 부족으로 새 수도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가 대두되었다. 특히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제국의 관료 체제를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새 수도를 건설할 필요성이 있었다. 중세 이슬람 역사가인 알 타바리알 카티브 알바그다디는 알 만수르가 도시 건설에 사용하기 위해 인근 크테시폰에 있는 호스로 궁전을 철거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767년에서 912년 사이의 바그다드 지도. 이 도시는 762년에 완공되었다.

762년, 마침내 티그리스 강둑 서안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도시에는 마디나트 앗 살람(مدينة السلام,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어졌으나, 훗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지명이었던 바그다드로 대체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도시는 그 규모가 지름 약 2.4km, 둘레 10km에 달했고 쿠파·시리아·호라산·바스라라는 이름의 4개의 문이 있는 이중 방어벽으로 둘러싸였다. 알 만수르는 칼리파의 궁전과 주요 모스크를 도시 중앙에 세우도록 했다.

알 만수르는 새로운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보유한 칼리파의 비전을 추구했다. 도시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방문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주민들은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유대교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수민족을 포함했는데, 이들은 모두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한편으로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무슬림들로 행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제국의 점진적인 이슬람화를 추구했으며, 농업 진흥·과학 후원·체계적인 관료 체제 구축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고 타 국가에서 수입한 천문학·수학·의학·철학과 같은 여러 분야의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이 모든 것은 훗날 바그다드가 세계적인 중심지로 거듭나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내부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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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페르시아 마왈리 지지 센터와 가까워 그들의 지지를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지배층들이었던 아랍인들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등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 무렵에 와지르의 직함이 새로 신설되어 중앙 권력을 일부 위임받게 되었는데, 이들은 칼리파에게 조언을 해주고 귀족들을 제어하는 등 제국의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더 작은 권한은 지방 토후들에게 나뉘어지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정책들은 아바스 칼리파를 이전의 정통 칼리파들이나 우마이야 칼리파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의례적이고 종교적인 역할에 치중하도록 유도했고, 훗날 궁정에서 권신들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대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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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수르는 그동안 우마이야 잔당 소탕과 내전 수습에 치중하느라 외세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대외 정책을 공세로 전환했다. 우선 비잔티움 제국 동부에 무슬림 군대를 파견하여 국경지대를 급습케 했으며, 763년에는 후우마이야 토후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토벌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보냈다. 그러나 공세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지휘 하에 아바스 군대의 공격을 잘 방어해 냈으며,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된 토벌대는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후 알 만수르는 후우마이야 토후국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고, 그의 군대를 동부 지역으로 집중시켰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알 만수르가 아바스-카롤링거 동맹을 시작한 것을 언급한다. 765년, 알 만수르의 바그다드 궁정에 카롤링거 왕 피핀 3세의 프랑크 사절단이 도착했다. 아마도 그는 공동의 적인 후우마이야 토후국에 맞서 아바스 왕조와 동맹을 맺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알 만수르는 사절단을 융숭히 대접했고, 768년에 그들은 아바스 사절단과 함께 프랑크 왕국으로 귀환했다. 피핀 3세는 아키텐에서 알 만수르의 사절단을 접견하고, 새로운 동맹의 증표로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이 동맹은 797년에서 807년 사이에 프랑크 왕 카롤루스와 아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대사관을 설립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한편으로, 알 만수르는 정기적으로 아바스 사절단을 중국에 보내어 정세를 파악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흑의대식黑衣大食(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으로 알려졌다. 이전에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던 것과 달리, 알 만수르 시기의 아바스 왕조는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터지자, 당 현종당 숙종을 지원하기 위해 약 3,000명의 용병을 모집하여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760년, 이에 대한 반발로 안록산군이 양저우에 있던 아랍 및 페르시아 무슬림 상인을 대거 학살하기도 했다.

或曰大食族中有孤列種, 世酋長, 號白衣大食. 種有二姓, 一曰盆尼末換, 二曰奚深. 有摩訶末者, 勇而智, 衆立爲王. 闢地三千里, 克夏臘城. 傳十四世, 至末換, 殺兄伊疾自王, 下怨其忍. 有呼羅珊 木鹿人並波悉林將討之, 徇衆曰: 「助我者, 皆黑衣.」 俄而衆數萬, 卽殺末換, 求奚深種孫阿蒲羅拔爲王, 更號黑衣大食. 蒲羅死, 弟阿蒲恭拂立. 至德初, 遣使者朝貢. 代宗取其兵平兩京. 阿蒲恭拂死, 子迷地立. 死, 弟訶論立. 貞元時, 與吐蕃相攻, 吐蕃歲西師, 故鮮盜邊. 十四年, 遣使者含嵯·烏鷄·沙北三人朝, 皆拜中郎將, 賚遣之. 傳言其國西南二千里山谷間, 有木生花如人首, 與語輒笑, 則落.

혹자는 대식 종족 가운데 고열(孤列)[a]이라는 종족이 있는데, 대대로 추장을 지내고 일컬어 백의대식(白衣大食)[b]이라 부른다고 한다. 종족에는 두 성(姓)이 있는데 하나는 분니말환(盆尼末換)[c]이고 또 하나는 해심(奚深)[d]이다. 마가말(摩訶末)[e] 이라는 자가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무리가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땅을 개척한 것이 3천 리이고 하랍성(夏臘城)[f]을 정복했다.

14대가 이어져 말환(末換)[g]에 이르렀는데 형 이질(伊疾)[h]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 아랫사람들이 그의 잔인함을 원망하였다. 호라산(呼羅珊)[i]목록(木鹿)[j]사람으로 병파슬림(並波悉林)[k]이 있었는데 그를 토벌하려고 하여 무리들에게 선포하기를 “나를 돕는 자는 모두 흑의(黑衣)를 입으라!”고 하였다.

금세 무리 수만 명이 말환을 죽이고 해심 종족의 후예인 아포라발(阿蒲羅拔)[l]을 왕으로 삼고 명칭을 고쳐 흑의대식(黑衣大食)이라고 하였다. 포라(蒲羅)가 사망하자 동생 아포공불(阿蒲恭拂)[m]이 즉위하였다. 지덕(至德) 초(756)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대종(代宗)[n]이 그의 병사를 취하여 (兩京)[o]을 평정했다. 아포공불이 사망하자 아들 미지(迷地)[p] 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자 동생 가론(訶論)[q]이 즉위하였다.[r]

정원(貞元) 연간(785~805)에 토번과 서로 싸워 토번이 매년 서쪽으로 원정을 갔고, 그래서 (토번이) 변경을 범하는 일이 드물었다. 14년(798) 사신 함차(含嵯)·오계(烏鷄)·사북(沙北) 세 사람을 보내서 입조하여, 모두 중랑장(中郎將)에 배수하고 하사품을 주어 보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나라의 서남쪽 2천 리 되는 곳 산곡 사이에 나무가 있는 마치 사람 머리와 같이 생긴 꽃을 피우며 말을 걸면 갑자기 웃고 곧 떨어져 버린다고 한다.

— 『신당서新唐書』 221卷 第 열전146 上·下 서역 중 발췌[2]

알 만수르는 당초 칼리파로 즉위할 때, 이복형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이사 이븐 무사를 후계자로 삼기로 아부 알 아바스와 약속을 했었다. 당시 이사 이븐 무사는 763년 쿠파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헤자즈 일대의 시아파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을 바탕으로, 궁정에서 상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 만수르는 그의 아들을 차기 칼리파로 세우기 위해 이븐 무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775년, 파르스 총독 할리드가 부정 부패 혐의로 이사를 고발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알 만수르가 뒷공작을 벌인 덕분이었다. 그러자 이븐 무사는 쿠파 총독 자리를 사임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알 만수르는 775년 말에 갑자기 급사했다. 그가 사망한 장소와 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한 기록에 따르면 그가 메카 순례를 떠났다가 이라크에 다다랐을 때 "죽음이 그를 따라잡았다"고 한다. 그는 메카에 묻혔으며, 무덤 주변에 100개의 위장 무덤을 만들어 도굴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었을 때, 제국 국고에는 6억 개의 디르함과 140만개의 디나르가 있었다. 현대 학자들은 알 만수르의 치세에 신생 제국이 안정화되고 복잡한 제도가 정착한 것을 예시로 들면서, 그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정치체 중 하나인 아바스 왕조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말한다.

알 마흐디(775–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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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 마흐디가 새 칼리파로 즉위했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스틴 마로치는 알 마흐디의 즉위를 두고 "(그것은)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 질서와 예의의 모델이었다."라고 묘사했다.

10년간의 평화로운 통치, 번영의 기반을 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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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마흐디는 칼리파로 즉위한 직후 아바스 궁정에 사산 제국의 화려한 의식과 관습을 도입했으며, 페르시아계 인사였던 아부 우바이달라 무아위야를 와지르로 임명하여 제국의 통치를 일부 위임했다. 무야위야는 대대적인 조세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의 농민에 대한 고정세금을 연간 수확량과 시장의 가격 변동을 고려한 비례 과세 체계로 대체했는데, 이 덕분에 제국의 행정력과 경제력에 큰 향상이 있었다. 한편으로 군대, 재무 및 세금 징수를 위한 새로운 부서들을 창설하여 보다 효율적인 업무를 가능케 했다.

제지 기술의 도입과 발전은 아바스 사회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그다드에서는 종이와 관련된 산업이 호황을 누렸는데, 심지어 도심의 한 거리 전체가 종이와 책의 판매에 전념했을 정도였다. 이들 종이의 저렴함과 내구성은 아바스 왕조 관료 체제의 비약적인 성장에 극히 필수적인 요소였다.

수도 바그다드는 알 마흐디의 통치 기간 동안 번영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페르시아, 심지어는 아프가니스탄과 스페인까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제국의 중심부로 끌어들였다. 도시는 증가하는 이슬람 인구 외에도 기독교인, 유대인,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의 고향이었다. 곧 바그다드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큰 대도시가 되었다.

780년, 알 마흐디는 무야위야를 야쿠브 이븐 다우드로 교체했다. 야쿠브는 시아파 인사로서, 알 만수르 시기에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사로잡혀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중이었다. 그가 제국의 최고위직 중 하나인 와지르로 선임되었다는 것은, 앞으로는 시아파를 가혹하게 탄압하지 않겠다는 알 마흐디의 의지였다. 이후 시아파는 자유를 어느정도 누릴 수 있었으며, 아바스 당국과의 관계 또한 상당히 완화되었다. '알 마흐디المهدي(신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자신들을 복권시켜준 것에 감명받은 시아파가 붙여준 별칭이었다.

알 마흐디는 개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통을 선호했던 듯 보이지만, 공적으로는 이슬람교 지도자로서 통치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슬람을 각지에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종종 모스크에서 직접 설교를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전 전임자들의 정책을 그대로 실시하여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갔고, 중앙 정부의 사법 권력을 강화하고 메카메디나의 증축 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알 만수르 시기부터 중용되던 바르마크 가문은 그의 치하에서 더욱 권세를 누렸으며, 783년 이후부터는 와지르 직위를 독점한 뒤 그와 긴밀히 협력하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아바스 국가의 번영을 보장하게 해 주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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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슬림들에게는 온화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였으나, '이교도'들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게 대응했다. 특히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무력 도발을 감행하던 비잔티움 제국은 아바스 제국에게 큰 문제가 되었다.

778년 비잔티움 황제 레온 4세의 명으로, 미하일 라차노드라콘이 이끄는 비잔티움 군대가 마라쉬를 점령한 뒤 시리아에 거주하던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트라키아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다음 해에 비잔티움 군대가 또 다시 아나톨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요새 도시인 하다트를 함락시키기에 이르자, 알 마흐디는 베테랑 장군 알 하산 이븐 카흐타바를 파견하여 이에 대응하도록 했다. 알 하산은 약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으로 쳐들어 갔으나, 적이 요새와 거점 도시들로 철수하자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780년 3월 12일, 알 마흐디는 바그다드를 떠나 알레포를 거쳐 하다트로 진군했고, 그곳을 다시 요새화했으며 여세를 몰아 아라비소스를 공격한 뒤 귀환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아들이었던 하룬에게 군대를 맡겨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도록 했다. 하룬은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급습하여 세말루오스의 몇몇 요새들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장군이었던 투마마는 트라키아 테마까지 서쪽으로 진군했지만 미하일 라차노드라콘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후 아바스 군대는 카파도키아를 재차 침공했으나 비잔티움 군대에게 격퇴되고 말았다.

이 패배는 새롭게 원정을 준비하던 알 마흐디를 격노시켰다. 그는 제국의 무력을 과시하고,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칼리파의 우월성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160만 노미스마타를 지불하여 약 1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소집했다. 이 금액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전체 연간 수입과 맞먹는 것이었으며, 병력은 소아시아에 주둔해있던 비잔티움 군대의 약 2배에 달했다. 알 마흐디는 아들 하룬을 총사령관을 임명하고,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조언자로 두어 원정을 시작했다.

782년 2월 9일, 하룬이 이끄는 군대가 바그다드를 출발했고, 곧 킬리키아를 통해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재빨리 국경 요새 마기다를 점령했다. 그럼 다음 그들은 아나톨리아 고원을 가로질러 프리기아 일대로 진격했다. 그곳에서 하룬은 부관 하지브 알 라비 이븐 유누스를 후방으로 보내어 그곳을 지키도록 했고, 장군 알 바르마크(아마도 아히야 이븐 칼리드)에게는 휘하 30,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부유한 서부 소아시아 해안 지대를 급습토록 했다. 한편 그 자신은 본대와 함께 옵시키온 테마로 진격했다.

그러나 초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군대는 곧 위기에 빠졌다. 후방의 군대가 니케타의 비잔티움 분견대에게 철저히 분쇄당했으며, 이로 인해 본국과의 보급선 및 연락망이 차단되었다. 또한 안토니우스 휘하의 타그마타부켈라리이가 점차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하룬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하룬이 협상을 요청하자, 당시 섭정을 맡고있던 황후 이리니는 가장 고위 관직을 맡고 있던 3명을 사절단으로 보냈다. 협상 과정에서 사소한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나라 사이에 3년 간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아랍측 기록은 비잔티움 제국이 매년 아바스 왕조에게 70,000에서 100,000 사이의 금화 및 비단 10,000필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알 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비잔티움 제국은 하룬의 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할 때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고 언급한다.

한편

알 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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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5년, 알 마흐디가 질투심을 품은 한 첩에게 독살당해 사망했다. 이후 그의 아들 중 장남이었던 알 하디가 칼리파로 즉위했다.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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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알 라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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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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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한 부족인 쿠라이시족Quraysh를 음역音譯한 것임이 분명하다.
  2. 일반적으로 당(唐)나라 기록에서 이 명칭은 우마이야朝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3. Banu Marwan의 음역音譯. 제3대 정통 칼리프였던 우스만의 후손들로서,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한 집안이기도 하다.
  4. 하심Hashim의 음역音譯으로, 무함마드가 속했던 가문家門의 명칭이자 동시에 압바스朝를 창시한 집안이기도 했다. 무함마드 출현 당시 쿠라이시 집단은 모두 10개의 큰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본전本傳에서는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 개의 가문, 즉 Banu Hashim과 Banu Marwan을 적시摘示한 것이다.
  5.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를 지칭한다.
  6. 하랍夏臘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카이로, 아프카니스탄의 헤라트 등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Bretschneider와 桑原隲蔵는 메소포타미아의 알 히라al-Ḥīra로 보았다. 그러나 田坂興道(1964上: 55~57)는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夏臘(*hia-lap)은 사실상 우마이야조의 중요도시였고 성도聖都로 유명한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7.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군주인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Marwan ibn Muhammad ibn Marwan, 즉 마르완 2세(치세 744~750)를 가리킨다.
  8. 우마이야조 12대 군주 야지드 3세를 음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본전本傳의 기록과 달리 그는 마르완 2세의 형이 아니다. 744년 야지드 3세는 왈리드 2세를 폐위·살해한 뒤 칼리프위에 올랐으나, 그 지위는 곧 그의 형제인 이브라힘에 의해 계승되었고, 이브라힘이 마르완 2세에게 피살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Hodgson 1974: 272~279 참조.
  9. 이란 동북부의 후라산Khurasan 지방
  10.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 위치한 메르브Merv
  11. 페르시아계로 추정되는 아부 무슬림Abu Muslim을 지칭. 본전本傳의 기록처럼 그는 후라산 지방에서 페르시아·아랍계 사람들을 규합하여 우마이야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심 가문에 속하는 아부 알 아바스Abu’l Abbas를 새로운 칼리프로 추대하여 압바스조를 성립시킨 인물이다. 흑의黑衣를 입었는지는 불확실하나, 다만 아부 무슬림은 휘하 군대에게 흑기黑旗를 걸고 싸우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Cf. Hourani, 1991: 32. 唐代 史料에 ‘흑의대식黑衣大食’은 압바스조를 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2. 우마이야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아부 알 아바스Abu’l Abbas를 음역音譯한 말. 아부 알 아바스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Abbas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13. 아부 알 압바스의 뒤를 이은 칼리프는 그의 동생인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Abu Jafar al-Mansur(재위 754~775)이며, 그가 至德 初(756)에 사신을 보냈다면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포공불阿蒲恭拂은 아포다불阿蒲茶拂의 오사誤寫로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14. 황제 이예李豫의 묘호廟號. 재위 762~779.
  15.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16. 알 만수르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무함마드 알 마흐디Muhammad al-Mahdi(재위 755~785). 즉 마흐디를 음사音寫한 셈이다.
  17. 이는 하룬Harun을 음사音寫한 것이 분명하며 그렇다면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재위 786~809)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함마드 알 마흐디의 동생이 아니라 아들이므로 본전本傳의 기사는 정확치 못하다고 할 수 있다.
  18. 『唐會要』卷100,『冊府元龜』卷966,『太平寰宇記』卷186에 모두 “迷地死, 子牟栖立; 牟栖死, 弟訶論(『冊府』에는 ‘訶’字 無)立.”라고 되어 있다. 저본의 교감기 참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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