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모네 디 사보이아 백작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이탈리아어: Aimone di Savoia, 1291년 12월 15일 - 1343년 6월 22일)는 1329년부터 1343년까지의 사보이아 백작이다.
아이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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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 1329년 - 1343년 |
전임 | 에도아르도 |
후임 | 아메데오 6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91년 12월 15일 |
출생지 | 샹베리 |
사망일 | 1343년 6월 22일 |
사망지 | 몽멜리앙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부친 | 아메데오 5세 |
모친 | 시빌 드 보제 |
배우자 | 비올란테 팔레올로고 |
생애
편집아메데오 5세 디 사보이아의 아들로 샹베리에서 태어났으며, 에도아르도의 동생이기도 했다.
1321년, 아이모네는 코르비에르 공성전 당시 공성 무기의 감독을 맡았다. 1323년 아메데오 5세가 사망한 후부터는 에도아르도의 통치 하에서 브레스의 영주로 있었다.[1]
귀족 가문의 어린 아들로서 아이모네는 교회에서 인생을 보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1329년에 에도아르도가 사망할 당시에 아이모네는 아비뇽에 위치한 교황 요한 22세의 궁정에 있었다.[1]
1329년에 곧 백작이 된 아이모네는 그의 친척 아메데오 3세 디 지네르바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분쟁은 봉지를 놓고 몇 세대를 거쳐 가문 간의 분쟁이였지만 그들은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몇 년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해 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아이모네는 평화공(il Pacifico)이라는 별칭을 얻었다.[2]
그는 사보이아 백작 작위를 두고 조카딸인 조반나 디 사보이아와 경쟁을 벌였는데, 사보이아는 살리카 법을 택한 이래로 여성 지도자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남편 장 3세 드 브르타뉴의 지원을 받은 조반나는 그녀의 권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과 조반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결국 아이모네는 조반나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백작 자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백작으로서 초기 몇 년을 두 가문 간의 봉지를 두고 몇 세대간의 분쟁을 계속한 도팽 기그 8세 드 비엔누아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1333년 라페리에르 공성전에서 기그가 전사하자, 프랑스의 군주 필리프 6세는 아이모네와 새로운 도팽이자 기그의 동생인 윔베르 2세 드 비엔누아와의 휴전을 중개할 수 있었다.[3]
1334년 8월 백년 전쟁 발발이 되면서 에드워드 3세는 아이모네에게 대사를 보내 잉글랜드 측에 합류하라는 설득을 하였다. 아이모네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토지를 보유하면서, 따지자면 두 왕들의 봉신이였기에 제안을 거절하였다. 1337년 4월, 필리프도 유사한 내용을 보내왔다. 아이모네는 도피네와의 영토 분쟁으로 해외에 나가 싸울 수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필리프는 윔베르가 도피네를 매각하게 하며, 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신속하게 해결했다. 아이모네는 1339년에서 1342년까지 프랑스의 전쟁 활동의 일환으로 그의 군대를 이끌었다.[4] 그는 자주 아메데오 3세 디 지네르바와 공동 출정을 하였다.
1330년 아이모네는 공문서를 다루는 수상 자리를 설치했다. 그는 1331년부터 1342년까지 건설된 오트콩브 수도원에서 장례 채플을 확장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5] 1340년, 그는 자신의 작업량을 줄이기 위해 성주와 자신 사이의 수준에서 항소를 구체적으로 처리하도록 판사를 설치했다.[6]
혼인과 자녀
편집혼인에 앞서 아이모네는 몇몇 사생아들의 아버지였으며, 결혼 이후에도 그들을 그의 집에서 길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7]
- 움베르토(Umberto) - 그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고, 그 후에는 형제들의 궁정에서 활동했다.
- 오제로(Oggero) - 그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
- 아메데오 (1346년 5월 사망)[8]
- 브누아(Benoît)
- 장 라 미트르{Jean la Mitre, 1348년 8월 사망) - 퀸[8]의 영주이자 타랑테즈, 앙트르몽의 성주
- 장 - 로잔의 참사원 회원
- 마리(Marie)
- 도나타(Donata) - 수녀
- 위게트(Huguette) - 수녀[7]
1330년, 아이모네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녀 비올란테 팔레올로고[1]와 혼인했고 자녀 다섯 명을 가졌으며, 그중에 어른이 된 이는 2명밖에 되지 않았다:
- 아메데오 6세 (1334–1383) 녹색공
- 비앙카 (1336–1388) -밀라노의 영주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와 1350년에 혼인.
- 조반니 (1338–1348) - 흑사병으로 사망[9]
- 카테리나(Caterina, 1341년) - 어릴때 사망
- 루도비코(Ludovico, 1342년 12월 24일 태어남) - 어릴때 사망
비올란테는 1342년 12월 24일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했다.[10] 아이모네는 다음 달에 병을 앓게 되었고, 1343년 6월 22일 사망했다.[10] 그는 부인과 나란히 오트콩브 수도원 채플에 매장되었다.[10]
참고 자료
편집- Cox, Eugene L. (1967). 《The Green Count of Savoy》.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LCCN 67-11030.
- Hourihane, Colum (2012). 《The Grove Encyclopedia of Medieval Art and Architecture》. Vol. 1. Oxford University Press.
각주
편집전임 에도아르도 |
사보이아 백작 1329년 - 1343년 |
후임 아메데오 6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