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 에카르트

안드레아스 "루트비히 오토" 에카르트(독일어: Andreas Ludwig Otto Eckardt), 한국어 이름 옥낙안(한국 한자: 玉樂安)은 독일가톨릭 신부였고, 신부의 신분을 사면받은 이후에는 한국학을 연구했다.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
원어이름Andreas Eckardt
성직
사제서품1909년
수여 베네딕도회 성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원
개인정보
출생1884년 9월 21일(1884-09-21)
독일 제국 뮌헨
선종1974년 1월 7일(1974-01-07)(89세)
서독 슈타른베르크
부모요한 니콜라우스 에카르트 (부), 바르바라 에카르트 (모)
배우자리아 로트
학력딜링겐의 김나지움
뮌헨대학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 박사

에카르트의 생애 전반적인 기록은 에카르트의 한국학 제자인 알브레히트 후베(Albrecht Huwe)의 증언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기록집에 의존한다. 에카르트는 요한 니콜라우스 에카르트(Johann Nikolaus Eckardt)와 바르바라 에카르트(Barbara Eckardt, 혼전 성 미상)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가이자 김나지움의 미술교사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8대 조선교구장 뮈텔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4명의 가톨릭 선교사 중 한 명으로 1909년 처음 한국에 방문했고 1928년 독일로 돌아왔다.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연구하여 1930년 학위논문인 <한국의 학교제도>(Das Schul wesen in Korea)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1년 자신과 인연이 있던 아우구스트 리이켈 교수를 소장으로 한 브라운슈바이크 대학교 공과대학의 국제 교육학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게되었다. 하지만 1931년 파시즘이 득세하고 나치가 집권하면서 국제 교육학연구소는 폐쇄되었고 이 시기 즈음에 다른 4명의 신부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신부로서의 신분을 사면 받아 속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기존 수도원 및 가톨릭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한편 힌덴부르크 제국 대통령에 의해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교수직이 추서되었고 그는 <한글의 기원>(Ursprung der Koreanischen Schrift)이라는 제목의 교수자격논문을 제출했다.

참고 문헌 편집

각주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