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六鎭)은 조선 세종두만강 남쪽의 국방상 요지에 설치한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부령 등 여섯 곳의 진을 말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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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부분이 육진이다.

본래 이 방면의 경략은 고려 말에 공민왕 때부터 있었고,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 때에는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하류까지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이 잦자 세종대왕김종서를 통하여 1434년(세종 16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경략하였다. 그 결과 두만강을 따라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6진이 설치되었고, 이와 함께 남부 지역에서 몇 차례의 이민이 실시되었다.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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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두만강 일대에 대한 경략에 공을 들인 이유는 두만강을 경계로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1][2] 외에도 두만강 인근인 경흥(慶興)에 그들 조상무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3][4] 6진이 설치됨으로써 두만강한국의 동북쪽 국경으로 확립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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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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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만강이 우리의 국경을 빙 둘러 싸서 흐르니, 하늘이 만든 험고(險固)이지 아니한가. 옛 사람이 큰 강으로 못(해자)을 삼는다고 한 뜻과 매우 합치한다. (豆滿江逈抱我疆, 而天作之險乎. 甚合古人大江爲池之意.)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 11월 19일 1번째기사
  2. 두만강은 하늘이 저들과 우리와의 한계를 만들어 준 것이다. … 만약에 두만강의 경계를 회복하여 수비하는 곳으로 벌여 두고 북쪽 변경을 진압한다면, 우리는 수비하는 편의가 있고 저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 감히 두만강을 넘지 못할 것이다. (豆滿江 天所以限彼我也. … 若復豆滿江之界 列置守禦之所 以鎭北鄙, 則我有守禦之利 而彼有疑懼之心 不敢踰豆滿江矣.)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5월 20일 4번째기사
  3. 옛 공주(孔州, 현 라선시 사회리 옛 경흥군 경흥면 고성동)의 땅이다. 태조 7년에 옛 토성의 터에 기초하여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그 땅에 덕릉(德陵)·안릉(安陵)의 두 능이 있고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인 까닭으로, 이름을 경원부라고 하였다. 태종 10년에 야인(野人)이 쳐들어와 결국 포기하고 지키지 못했다. (古孔州. 太祖七年 因古土城基 改築石城. 以其地有德安兩陵 且肇基之地, 故號慶源府. 太宗十年 因野人入寇 遂棄不守.)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경흥도호부
  4. 신설한 네 읍(회령, 경원, 종성, 공성)은 우리 조종께서 처음 기초를 정하신 땅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 … 생각하건대 조종께서 왕업을 일으킨 땅을 버려둘 수 없다. (新設四邑 我祖宗肇基之地 以豆滿江爲界. … 予以謂 祖宗興王之地 不可空棄.)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5월 20일 4번째기사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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