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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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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의기사(晋州 義妓祠)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촉석루 입구에서 뒷쪽으로, 정면에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 의기사
(晋州 義妓祠)
대한민국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종목문화재자료 제7호
(1983년 7월 20일 지정)
수량1동
시대조선시대 (1607년)
관리진주시
주소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8번지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편집

의기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는 한옥 사당으로, 촉석루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1721년 경종 원년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지역민 등의 요구와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1740년 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다.

1779년 정조 3년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낡고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고, 사위인 다산(茶山) 정약용에게 《의기사기》를 지어 걸도록 하였다. 1823년 순조 23년 진주목사 홍백순(洪百淳)과 경상감사 이지연(李止淵)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춘추(春秋)로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1868년 고종 5년에 진주목사 정현석이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한 이래로 현재까지 여성들만 제관이 되어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 의암별제는 일제강점기 때 잠깐 단승되었다가 최근에 복원이 이루어져 진주논개제의 메인 테마로 시행되고 있다.[2]

1950년 6·25전쟁으로 의기사는 완전 소실되었다가 1960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하여 현재의 촉석루 옆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헌시편집

 
설창수 시인이 지은 의랑논개의 비

정면 의기사라는 간판 좌측에 일제 때의 명기 산홍(山紅)의 시가 걸려 있다. 황현매천야록에서 산홍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을사오적으로 악명이 높았던 친일파 이지용이 천금을 가기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비록 첩이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의 구실을 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꾸짖은 의기높은 기생이었다. 정면 우측으로는 정약용의 《의기사기》와 《의기사중건기》 시 1수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의기사 입구에 논개의 충절을 찬양한 〈의랑 논개의 비〉는 개천예술제의 창시자이자, 아직도 생존해 있는 지방 향토 시인 설창수가 1954년 글을 짓고, 오제봉이 글을 썼다.[3] 또한 진주성 입구에는 변영로의 《논개시비》가 서 있다.

영정편집

1960년 의기사가 중건된 이후 김은호가 그린 논개 영정이 봉안되어 왔지만, 복식과 머리모양 등을 고증하여 본 결과 당대와 맞지 않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진주시와 장수군이 전국 현상공모와 과학적인 고증을 통해,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된 영정을 2008년 5월 23일 교체하여 봉안하였다.

영정 작업에는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참여를 했으며, 비단 바탕에 가로 110 cm, 세로 180cm의 크기로 작업을 했다. 의기사에 있는 것은 복사본이며, 정본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0개의 손가락에 10개의 가락지를 낀 모습이 인상적이다.[4]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경상남도 고시 제2018-485호,《경상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경상남도지사, 2018-12-20
  2. 한갑진.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의기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년 12월 16일에 확인함. 
  3. 진주금석문총람(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4. 의기사 안내문, 진주성 관리사무소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