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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李炳注, 1921년 3월 16일 ~ 1992년 4월 3일)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소설가이다. 본관은 합천. 호는 나림(那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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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출생 1921년 3월 16일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군
사망 1992년 4월 3일(1992-04-03) (71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티
직업 작가, 언론인, 교육인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장르 소설

생애편집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안남골에서 아버지 이세식(李世植)과 어머니 김수조(金守祚) 사이에서 3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형제들이 ‘8형제 8천석 8진사’로 이름날 정도로 선대가 하동의 유지였고, 아버지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기 전 5년제 중학과정인 진주농림학교(현 진주산업대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이 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 사소한 일로 일본인 훈육주임을 폭행하여 퇴학당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검정고시를 거쳐 중졸학력을 취득하였고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태평양 전쟁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붙들려 연극동맹(문예선전대) 책임자로 부역하였다. 1950년 9월 진주 수복 후 경상대학교 조교수직을 사임하였다. 부역 문제로 부산으로 떠났다가 10월 진주경찰서에 자수하여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12월 미군 CIC(방첩대)에 연행되어 구속 10일 만에 풀려났다.

전쟁이 종전된 뒤 귀향하여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 교수로 이 대학에 재직 중이던 1953년에 《부산일보》에 장편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하였으나, 정식으로 중앙 문단에 등단하지는 않았고 그 뒤로도 정식으로 신춘문예 입선이나 문예지 추천 등의 절차를 거쳐 문단에 데뷔한 적은 없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일본의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지방유력지의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스스로 상당한 필력이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 문단의 최고원로 문인으로 대접받았던 김동리가 불과 중학4년 중퇴의 학력이었던 점 등 문인들의 상당수가 제대로 된 학벌이나 지식이 없었고 이병주가 판단하기에 대부분의 문인들의 필력이 일본문인들에 비해 초보적 수준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굳이 그런 실력의 문단에 자신이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1955년부터 부산에서 국제신보사(오늘날 국제신문) 편집국장 및 주필로 활발히 활동하였고 이때도 별도의 필명으로 국제신보에 소설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1961년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그의 평소 성향이 좌익적이었다고 판단한 군정당국의 좌익예비검속자 단속에 걸려 구속되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동안 복역했다.그런데 그의 자전소설인 《그해 5월》에 따르면, 이 때 4ᆞ19 직후 감옥에서 장기복역후 출옥한 소수의 남로당 출신들에 의해 남로당 재건음모가 진행중이었는데,그들은 1961년 5월 중순의 어느날을 D-day로 잡고 결혼식을 가장하여 동지들을 불러모으는 전략을 짰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결혼식의 주례가 바로 이병주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례부탁을 받고 승락하였는데 경찰은 그 조직원 중 한 명을 포섭하여 끄나풀로 심어놓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의 계획을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았고 결혼식날 그 조직원들이 모두 모이면 일망타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만약 이병주가 멋모르고 주례를 섰다면 꼼짝없이 남로당 재건시도혐의를 덮어썼을것이고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사형 내지는 무기징역을 면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며칠을 앞두고 느닷없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쿠데타세력의 좌익계 예비검속에 걸려 그가 체포됨으로써 불행중 다행으로 남로당 재건작업에 가담할 뻔한 일이 차단된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죄도 없이 평소 좌익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2년7개월간 복역후 44세의 나이로 출감한 후 취업은 사실상 금지되었고 먹고 살 길이 너무나 막연했다. 그 상태에서 가끔씩 가던 요정 마담의 격려를 받아가며 처음으로 중편소설<알렉산드리아>를 월간《세대》지에 집필하였는데, 소설 제목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이집트 연안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 정한 것은 그만큼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된 상태에서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정신적으로나마 마음껏 자유로움을 구가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이 소설이 극찬을 받은 이후에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나서서 1992년 사망할때까지 27년 동안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였다.

《지리산》(초판 1985년, 기린원),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등 현대사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을 즐겨 썼다. 선이 굵은 남성적 소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1]. 그의 소설의 특징은 꼭 작품속에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들어가는데 특히 《그 해 5월》에 등장하는 <이사마>란 인물은 자신과 사마천을 반반씩 합성한 인물로서 그는 유신체제하에서 탄압받는 자신을 사마천과 동일시하고 있는데 자신의 롤모델을 사마천으로 정한것으로 봐서 그는 아마도 자신을 문학가보다는 역사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장편 《지리산》에서는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등장시키고 있는데 주인공 박태영은 자신의 고향 및 와세다대학2년 선배로서 남로당 출신으로 북한정권의 차관급 직책에 올랐던 박갑동을 모델로 한것이고 그의 친구인 이규는 바로 자신을 모델로 한것이다. 이밖에도 하준규는 함양출신으로 해방전 일본유학 도중 학병징집을 거부하고 피신한 덕유산에서 자생적 빨치산<보광당>을 조직했고 해방후 북한 인민군 중장이 되어 직접 남한에 와서 남도부란 가명으로 팔공산 빨치산대장으로 활약하다가 특무대에 체포되어 처형된 하준수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규가 해인사에서 요양도중 빨치산에 납치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강제로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한 월간지가 이병주 사후에 그의 빨치산 활동의혹을 보도하자 아들인 이권기 경성대교수에 의해 허위보도에 의한 명예훼손 및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소설 《산하》에서는 해방이 뭔지도 모르는 일자무식 노름꾼 이종문이 해방후 서울에 올라갔다가 어느날 우연히 이승만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갑자기 건설업자가 되어 부자가 되고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어 벼락출세를 했다가 4ᆞ19후 몰락하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통해 자유당 정권의 내막을 매우 희화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실제인물인 경남 하동출신 자유당 국회의원 이용범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를 정도여서 사사오입 개헌을 위한 국회표결 당일 투표지에 표기를 잘못하여 1표차로 개헌안의 부결과 가결의 번복파동을 불러왔던 장본인이었다. 이병주는 이 소설에서 이종문이 너무 무식해서 이승만에게 좌고우면하지않고 충성했던 순진한 인물로 그린 반면에 그런 그를 철저하게 이용해먹은 자유당 지도부를 교활하게 묘사해서 대비시키고 있다. 작품속에서 이종문은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함께 몰락해서 의원직을 잃고 목욕탕 종업원으로 비참하게 살다가 병사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실제모델인 이용범은 정치활동은 중단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기업체를 경영하는등 노후에도 부유한 삶을 살았고 연고지인 경남 창원에 사립 전문대와 중ᆞ고교를 설립하여 현재도 그의 자손들에 의해 재단이 유지되고 있다.

그는 70년대에는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금기시된 소재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의 고뇌를 앞장서서 다루어, 유신체제 하인 1970년대 중반에는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2]

실제로 그의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경력, 계획 없는 경제 정책, 유신독재 치하의 인권 침해 등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유신 독재 치하에서 대학생들조차 읽은 적이 없을 정도로 금서취급받던 안네의 일기와 역사적 배경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다방 마담이 장소협조를 하고, 지식인기자가 강의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돼지를 많이 키우라고 해서 키웠는데 가격이 급락해서 농민들이 몰락한 이야기, 박 대통령이 친일 경력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는 이야기 등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전두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데 이 점은 그가 쓴 역대대통령들의 평가서인 《대통령들의 초상》에서 확인된다. 이는 전두환이 총각장교시절부터 그의 소설의 광팬인데다가 전두환의 생가가 있는 합천(전두환의 고향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이지만 전두환의 조부가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의 9촌조카인 관계로 전봉준 처형후 그의 삼족을 멸하자 전두환의 조부는 합천으로 도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이 이병주의 성장지인 진주 바로 옆인 관계로 대통령 시절 수시로 이병주를 청와대로 불러 식사대접을 하고 밤을 세워 가며 막걸리를 마시며 작품에 관한 토론을 하는등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기 때문인것으로 추정된다. 전두환은 집권초기인 1982년 박정희 시절 금서목록에 올랐던 이병주의 일부작품들을 모두 해금시켜줬고 그의 작품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에도 여러가지 지원을 아끼지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전두환이 퇴임후 백담사에 쫓겨가기전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할때 비서관이 작성한 문안을 이병주가 다듬기도 했다. 전두환은 당시 TV가 들어오지 않는 백담사에서 그의 소설 《남로당》시리즈를 갖고가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가 한창 필력을 떨치며 인기절정에 올랐던 1970~80년대에는 그의 소설은 찍기만 하면 날개돗힌 듯이 팔려나가서 출판업자들 사이에서는 돈이 되는 그의 작품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고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도 노소를 가리지않고 그의 인기가 높아서 한때 인기프로인 MBC 라디오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에도 고정게스트로 출연하였으나 그의 느릿한 말투에다가 너무 심한 사투리 때문에 도저히 방송을 하기가 불가할 정도여서 중도에 하차한 적도 있었다. 1992년 4월 3일 집필을 위해 장기여행 도중 미국 뉴욕의 임시거주하던 아파트에서 급성폐렴으로 인해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때 사망하기 2개월 전 이병주는 일본 동경에서 작품집필을 위한 여행중이었는데 그가 머물고 있던 동경 데이코쿠호텔(제국호텔)에서 마침 학술회의 참석차 동경에 와있던 아들 이권기 부산 경성대 교수를 만나 자신이 쓰고 남은 상당액의 달러를 주면서 "이것밖에 줄게 없구나"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죽기 전 아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향이자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경남 하동군에는 이병주문학관[3] 이, 섬진강 강변에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가족관계편집

  • 아버지 : 이세식(李世植)
  • 어머니 : 김수조(金守祚)
  • 장인 : 이용호(李龍浩)
    • 부인 : 이점휘(李點輝)
      • 아들 : 이권기(李權基) - 경성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 딸 : 이서영(李瑞英)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공지영 (2006년 4월 27일). “산하가 된 그 이름 이병주”. 한겨레. 2008년 6월 23일에 확인함. 
  2. 손철주 (2006년 4월 21일). “방황하는 청춘아, 이병주를 읽어라”. 조선일보. 2015년 4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6월 23일에 확인함. 
  3. 김상진 (2008년 4월 23일). “소설가 이병주 기리는 문학관 문 열어”. 중앙일보. 2008년 6월 2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