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혁(李普赫, 1684 ~ 176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 시호는 충정(忠貞).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의 재종손이며,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의 조카이다. 아들인 이경호·이중호 형제를 비롯하여 후손 6명이 대과에 급제하였고, 손자 이재협은 1789년(정조 13년)에 영의정을 지냈다.

1725년(영조 1년)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라 평양부윤이 되었으나 부정혐의로 관리명부에서 삭제되었다.

1728년(영조 4년) 성주목사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이속과 장정들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키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이때 안무사 황선(黃璿)이 그에게 문무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 우방장(友防將)으로 차출하여 고령·지례·거창 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조정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이라는 훈호(勳號)를 내리고 인평부원군(仁平府院君)에 봉하였다.

1733년(영조 9년)에는 동지의금부사와 호조 참판, 1736년(영조 12년)에는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어 1737년(영조 13년)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공홍도는 지금의 충청도]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738년(영조 14년) 형벌을 남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

1740년(영조 16년) 다시 풍덕부사(豐德府使)[풍덕부는 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로 등용되었고, 군액이 과도하게 책정되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병조 참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고, 1753년(영조 29년) 공조 판서에 올랐다.

이로써 이보혁은 용인이씨 중 조선조에서 1품직의 공신에게 내리는 부원군(府院君)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