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아의 엘리자베트

(이사벨 데 발로이스에서 넘어옴)

스페인 여왕 엘리자베트 데 발루아(Élisabeth de de Valois) 또는 엘리자베트 데 라 파즈(Isabel de La Paz)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Élisabeth de France, 1545년 4월 2일 ~ 1568년 10월 3일)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이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3번째 아내로서[1] 스페인, 시칠리아, 나폴리 왕비, 부르고뉴, 밀라노, 브라반트, 룩셈부르크, 림부르크 공작부인, 플랑드르, 에노 백작부인 및 부르고뉴 궁정백작 부인이 되었다.

발루아의 엘리자베트

그녀는 주세페 베르디그랑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작중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오페라는 프리드리히 폰 쉴러가 쓴 동명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영향을 받았다.

생애

편집

유년기

편집

1545년 프랑스 퐁텐블로 성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 어머니는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떨어져 왕족들의 양육을 독점하였던 왕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의 휘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디안의 품에서 자랐고 성장한 뒤에는 스페인으로 떠난 탓에 실질적으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으나 천성적으로 수줍음 많고 순종적이며 다정한 성격을 지녀 동생 앙주 공작 앙리(Henri, duc d'Anjou : 후일의 앙리 3세)와 더불어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편애를 받는 자녀가 되었다. 또한 두 살 연하의 동생 클로드(Claude de France : 후일의 로렌 공작 부인)와 더불어 함께 궁정에서 자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550년, 아버지 앙리 2세는 영국의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을 논의했다.[2] 교황 율리오 3세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파문하겠다고 했으나,[2] 앙리 2세는 이를 무시했다. 20만 에쿠스가 지참금으로 합의되는 등 약혼에 대한 협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면서 약혼은 무산되었다.[2]

결혼과 사망

편집

1559년 프랑스스페인 사이에 평화조약인 카토-캉브레지 조약(Traités du Cateau-Cambrésis)이 체결되면서 조약의 일환으로 14세의 나이에 스페인 왕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당시 펠리페 2세는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메리 1세 여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펠리페 2세가 처제이자 새로이 잉글랜드의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으나[출처 필요] 엘리자베스 1세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였다.

노트르담에서의 대리 결혼식과 이를 축하하는 축제 중에 열린 마상 창시합에서 아버지인 앙리 2세가 사고로 급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터졌다.[3] 장례식을 치른후 엘리자베트가 스페인으로 건너갔고 실제 결혼식은 스페인의 과달라하라에서 다시 진행되었다. 결혼 당시 엘리자베트보다 18세 연상이었던 펠리페 2세는 어린 아내에게 다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펠리페 2세는 당시 그의 유일한 후계자인 돈 카를로스 왕자의 기행이 점점 심해지면서 엘리자베트로부터 또 다른 후계자들을 얻는 것을 간절히 바랐다. 결혼 초기 엘리자베트는 유산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1566년 딸 엘리자베트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두 딸을 낳았다.[1] 그러나 1568년 왕자를 사산한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자녀

편집

돈 카를로스

편집

돈 카를로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그의 첫번째 왕비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였다. 왕세자 돈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사도세자’라고 할 수 있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는 몸이 성하지 못했고 대식가이며 정신착란증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부모의 근친 결혼에 의한 유전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평소 돈 카를로스의 부적절한 처신과 행실은 여러차례 문제를 야기했으며[4]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않좋았다.

돈 카를로스는 1559년 당시에 엘리자베트와 약혼한 상태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파혼이 이루어졌고, 엘리자베트는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5] 파혼은 제8차 이탈리아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1559년 4월에 체결한 카토-캉브레지 조약의 결과물이었기에 불가피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약혼녀를 아내로 삼은 이 결혼에 대해 논란이 있었으며, 이 일로 인해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 펠리페 2세와 더욱 갈등하게 되었고 부자 사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계모가 된 엘리자베트가 돈 카를로스를 다정하게 대하자 둘의 관계를 모자 관계 이상으로 의심하는 시각이 생겨났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대체적으로 회의적인 편이지만, 베르디의 유명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와 같은 작품에서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로 묘사되기도 했다.[6]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와 갈등 끝에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가고 싶어 했으나, 1568년 부왕 펠리프 2세를 암살하려다 발각되는 일이 있었고, 이후 정신질환과 포악함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독방에 갇힌 후 6개월 후 사망했다. 펠리페 2세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증거는 없다.[7] 엘리자베트는 돈 카를로스가 죽은 지 70일 후에 펠리페 2세의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사망후에 이 두사람은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나란히 묻히는데 무덤의 배치는 펠리페 2세가 했다고 한다. 펠리페 2세 역시 사후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매장되었는데 돈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타가 묻힌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6] 돈 카를로스의 비극적인 생애는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에서 다루어지기도 했다.[8]

각주

편집
  1. [네이버 지식백과] 펠리페 2세 [Felipe I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543년 포르투갈 왕국의 왕 주앙 3세의 맏딸인 마리아 마누엘라(María Manuela de Portugal)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1545년 아들인 카를로스(Carlos de Austria)를 낳은 뒤 죽었다. 1554년에 헨리 8세의 딸이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와 다시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558년 메리 1세가 죽자 1559년에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 엘리사벳(Élisabeth de France)과 재혼해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Isabel Clara Eugenia de Austria)와 카탈리나 미카엘라(Catalina Micaela de Austria)를 낳았다.
  2. Baumgartner, Frederic J. (1988). Henry II, King of France:1547-1559. Duke University Press. p123
  3. [네이버 지식백과] 앙리 2세 [Henry II] - 이탈리아 전쟁의 종결과 개신교 탄압 (프랑스 왕가, 홍용진)....두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성대하게 벌어졌고 이를 위해 앙리 2세는 직접 자신이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기로 했다. 그의 상대는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드 로르주였는데 마상 창시합에서 가브리엘의 경기용 창이 앙리 2세의 안면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중략)...눈 부위를 크게 다친 앙리 2세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다 결국 7월 10일 사망하고 말았다.
  4. 서희석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년 p365
  5. [네이버 지식백과] 앙리 2세 [Henry II] - 이탈리아 전쟁의 종결과 개신교 탄압 (프랑스 왕가, 홍용진).......1559년 4월 2일과 4월 3일 양일에 걸쳐 앙리 2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그리고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었다...(중략)...카토-캉브레지 조약의 일환으로 1559년 6월 30일 딸 엘리자베트와 펠리페 2세 사이의 결혼 및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부아 공작 엠마뉘엘-필리베르의 결혼이 동시에 거행되었다.
  6. [네이버 지식백과] 펠리페 2세 [Philip Ⅱ] - 무적함대의 스페인을 이끈 국왕 (스페인 왕가, 김현철)
  7.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로스 [Carlos de Austri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8. [네이버 지식백과] 돈카를로스 [Don Carlo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