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순 (대한제국)
이용순(李龍淳, ? - ?)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인, 사회사업가이다. 독립운동가 이교문의 손자이며 송재 서재필, 서재창의 외종손이기도 하다. 자는 현향(現鄕)이고 호는 용암(龍岩)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생애
편집항일의병장인 이교문[1](李敎文)의 손자이자 이일의 아들이다. 5대조 이유원이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정착하였고 그의 아들들 중 이용순의 고조할아버지인 이기대(李箕大)는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보성군의 갑부가 되었으며 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증대고모할머니 성주이씨는 1860년대 초 동복군수를 지낸 서광효에게 출가했는데, 서재필과 서재창이 그들의 아들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그의 집안은 연좌제로 사형당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전전긍긍했다 한다.
일제강점기에 그의 집안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의 전신)을 다녔다.
경성법전을 졸업한 용순은 낙향, 학숙을 열며 고향을 일구었다.[2]
그의 3형제 모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2] 1947년 서재필은 귀국하자마자 외종손 용순을 만났다. 서재필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나로 인하여 외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고향에 돌아가 가세를 유지하길 바란다"고 했다.[2] 아버지 이일은 미국에 있던 내종숙 서재필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 편지서신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일과 서재필 주고 받았던 서신은 한국전쟁때 집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2]
1947년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갈 때 용순에게 '제발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 수신제가(修身齊家)하고 가업에 충실하라'하고 당부하였다. 이후 이용순은 고향인 보성군으로 돌아가 장학 사업과 교육 지원 활동 등에 전념했다. 후일 서재필의 시신이 환국했을 때 그의 시신을 돌보고 국립묘지 안장의 수발을 든 것은 이용순의 후예들이었다. 이는 갑신정변으로 서재필의 형제와 조카, 이복 형제들이 몰살당하고 살아남은 조카들도 멀리 피신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이나 조카 서명원 등은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관계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오마이뉴스
- ↑ 가 나 다 라 서재필 선생의 외가, 보성 '성주 이씨' Archived 2014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조선일보 2008.06.29
외부 링크
편집- 서재필 선생의 외가, 보성 '성주 이씨' 조선일보 2008.06.29
-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오마이뉴스
- 이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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