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직

궁내부 특진관, 학부대신, 총독부 중추원 고문, 경학원 부제학, 연합회의소 소장

이용직(李容稙, 1852년 ~ 1932년 4월 3일)은 문장가로 유명하던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호는 강암(剛庵), 본관은 한산이며 을사조약 때 순절한 조병세의 사위이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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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별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890년 이조 참의에 올랐고 1892년 이조참판에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후 내무협판, 송도유수, 춘천부사, 학부협판, 학부참찬 등을 거쳤고 1900년 찬정(贊政), 1902년 비서경을 지낸 뒤 1903년1904년황해도 관찰사와 전라북도 관찰사를 각각 지냈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4년1909년에 학부대신을 두 차례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당시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일본의 수해위문 특파대신 자격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나나시피 강제 출장당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10월 1일조선총독부 중추원 설립과 함께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0월 16일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김윤식과 함께 독립 청원서인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작성해 보냈으며 그 때문에 1919년 7월 17일에 김윤식과 함께 모든 작위와 직책을 박탈당하였다.

그는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한때 조선귀족 신분이었으나 김윤식과 함께 3·1 운동에 동조하여 작위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각종 친일파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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