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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는 오다련(吳多憐)과 연덕교(連德交) 소생이자 태조(太祖)의 제2왕후이다. 성은 오씨(吳氏) 이름은 도영 본관은 나주(羅州). 나주(羅州)의 호족 오부돈(吳富敦)의 손녀이다. 혜종(惠宗)의 어머니이다.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羅州)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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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
왕건과 장화왕후.jpg
지위
왕비
전임자 신혜왕후
후임자 신명순성왕후
이름
오도영
시호 장화왕후
신상정보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
사망일 황해북도 개성
왕조 고려
부친 오다련
모친 연덕교
배우자 태조
자녀 혜종
종교 불교
장군시절의 태조 왕건과 오씨(훗날의 장화왕후)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할아버지는 오부돈(吳富敦)이고 아버지는 오다련군(吳多憐君)이다. 선조는 500년(지증왕(智證王) 1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오첨(吳瞻)이다. 오첨(吳瞻)은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초나라 제상)의 45세손이며,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두 아들 중에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신라 통일 후 그의 집안은 나주(羅州)의 목포(木浦)에 살았는데 다련군(多憐君)이 신라시대에 사간(沙干)을 지낸 연위(連位)의 딸 연덕교(連德交)와 결혼하여 장화왕후를 두었다고 한다.

왕건903년909년, 913년에 각각 나주에 출진하였는데, 장화왕후의 아들인 혜종912년에 태어났으므로 장화왕후는 왕건과 903년이나 909년 경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1][2]. 처녀시절 오씨는 꿈에 포구(浦)의 용(龍)이 와서 배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놀라 깨어 부모에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궁예로부터 수군 장군으로 임명된 왕건군사를 이끌고 나주로 출정하여 목포(木浦)에 배를 머무르고 있었다.

왕건과 만남편집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군 등 서남의 귀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던 왕건이 오색(五色)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

본래 신분이 낮은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태조를 만나 혜종을 낳고, 대광(大匡)인 박술희(朴述熙) 등의 비호를 받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나주 지역에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조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책비 이후편집

태조혜종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근거지가 나주이므로 개경 호족들의 반발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태자 무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 무(太子 武)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934년을 전후해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943년 아들 혜종의 즉위를 보았으나 2년 뒤 아들의 서거도 목격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녀가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사후편집

정치적으로 패하였던 장화왕후의 사후에 한가지 전설이 덧붙여졌다. 고려사에도 수록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빨래터에서 만난 오씨를 불러 시침하였으나 오씨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므로 임신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비하성 전설이 고려사에 전한다.

그 후 혜종이 태어났는데,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왕을 상징하는 '용'자를 써서 이름을 '흥룡동'이라 하였다.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이 지금도 나주 시청 앞쪽의 도로 옆에 있고,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남아 있다.

가족 관계편집

친정

  • 조부 : 오부돈(吳富伅)
  • 조모 : ?
    • 아버지 : 다련군 오희[3](多憐君 吳禧)
  • 외조부 : 신라 사간 연위(沙干 連位)
  • 외조모 : ?

왕가

장화왕후가 등장한 작품편집

출처편집

  1. 네이버 지식백과 - 〈고려사〉태조 후비
  2. 일부 자료(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왕건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던 914년 수군 장군(水軍將軍)으로 전라남도 나주 지방에 출전하였을 때 그 곳에서 혼인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장화왕후의 아들인 혜종의 생년(912년)보다 혼인 시기가 늦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3. [1] Archived 2015년 4월 2일 - 웨이백 머신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