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량(前凉, 301년 ~ 376년)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족 출신의 장궤(張軌)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凉)이지만 같은 국호를 가진 국가가 많기 때문에 전량이라 불린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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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궤는 서진(西晉)의 관료로 상서랑(尙書郞), 산기상시(散騎常侍) 등의 중직을 역임했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장궤는 중앙 조정의 한계를 깨닫고 301년에 호강교위·양주자사(護羌校尉, 凉州刺史)를 자청해 양주(凉州 : 간쑤성 중서부)에 부임하였다. 이후 양주의 반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장궤는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로서 자처하였다. 영가의 난으로 흉노족에 의해 서진의 낙양(洛陽)이 함락되고 서진의 장안(長安)이 전조(前趙)의 공격을 받아 유린될 때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로에 따라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군공(西平郡公)에 임명하였다.

314년에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張寔)이 뒤를 이어 양주자사, 서평공이 되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로 자처하였으며, 317년에 흉노족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도망친 사마예(司馬睿)가 동진(東晉)을 건국하자 다시 동진에 복종하였다. 다만 동진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유홍(劉弘)이 종교 반란을 일으켜 장식이 진압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閻涉)에 의해 암살당했다.

장식의 동생 장무(張茂)가 동진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사사로이 즉위하였다. 보통 이때부터 전량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장무는 동진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였다. 전조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의 소유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323년 전조의 흉노족 유요(劉曜)가 28만의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장무는 굴복하여 전조의 흉노족 유요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였다. 전조는 장무를 양왕(凉王)에 봉했다. 장무는 324년에 병사하고, 그 뒤를 장식의 아들 장준(張駿)이 계승했다.

장준은 전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쪽의 성한(成漢)과 왕성하게 교류하고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329년,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346년 장준이 죽고, 차남 장중화(張重華)가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의 석호(石虎)가 대군을 동원하여 쳐들어와 진주 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사애(謝艾)를 등용하여 후조의 침입을 막는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前秦)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353년에는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353년 장중화가 죽자 아들 장요령(張耀靈)이 뒤를 이었으나 장요령의 후견인인 숙부 장조(張祚)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354년 장조는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화평(和平)으로 정하였다. 장조는 사애를 살해하고,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으며, 355년에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이 반정을 일으켜 장조를 살해하고 장중화의 서자였던 장현정(張玄靚)을 옹립하였다.

장관은 정권을 전횡하여 송혼(宋混)에게 살해되었으며, 송혼이 죽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송징(宋澄), 장옹(張邕) 등도 차례로 살해되었다. 363년에 장준의 막내아들 장천석(張天錫)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량은 흉노족 전진에 복속하였으며, 363년에 장천석이 장현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력확대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371년에 다시 흉노족들의 공격에 굴복하여 전진에 복속되었다. 이후 전진에 의해 장천석의 처와 부모가 흉노족의 포로로 끌려가자 사치에 빠진 장천석은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후계자 문제로 국내가 혼란에 빠졌다. 이를 틈타 저족 부견(苻堅)은 저족 장수 요장(姚萇)을 보내 장천석을 죽이고 전량을 멸망시켰고 한족 장천석의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376년)

역대 군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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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량 군주와 연호
대수 묘호 동진 시호 전량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제1대 양 태조
(凉太祖)
무목공
(武穆公)
무왕
(武王)
장궤(張軌) - 301년 ~ 314년 건릉(建陵)
제2대 양 고조
(凉高祖)
명원공
(明元公)
명왕
(明王)
장식(張寔) 영안(永安) 314년 ~ 320년 314년 ~ 320년 영릉(寧陵)
제3대 양 태종
(凉太宗)
성렬공
(成烈公)
성왕
(成王)
장무(張茂) 영원(永元) 320년 ~ 324년 320년 ~ 324년 평릉(平陵)
제4대 양 세조
(凉世祖)
충성공
(忠成公)
문왕
(文王)
장준(張駿) 태원(太元) 324년 ~ 346년 324년 ~ 346년 대릉(大陵)
제5대 양 세종
(凉世宗)
경렬공
(敬烈公)
환왕
(桓王)
장중화(張重華) 영락(永樂) 346년 ~ 353년 346년 ~ 353년 현릉(顯陵)
제6대 - - 애공
(哀公)
장요령(張耀靈) - 353년 -
제7대 - - 위왕
(威王)
장조(張祚) 화평(和平) 354년 ~ 355년 354년 ~ 355년 민릉(愍陵)
제8대 - 경도공
(敬悼公)
충왕
(沖王)
장현정(張玄靚) 태시(太始) 355년 ~ 363년 355년 ~ 363년 평릉(平陵)
제9대 - - 도공
(悼公)
장천석(張天錫) 태청(太淸) 363년 ~ 376년 363년 ~ 376년 -
비정통 - - 평왕
(平王)
장대예(張大豫) 봉황(鳳凰) 386년 ~ 387년 386년 ~ 387년 -
  • 301년 ~ 317년까지는 서진(西晉)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317년 ~ 353년, 355년 ~ 361년에는 서진의 건흥(建興)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그 외에 대내적으로 사용했던 독자 연호가 있었다. 361년 ~ 376년까지는 동진(東晉)의 승평(昇平) 연호를 사용하였고, 역시 대내적으로 사용한 독자 연호가 있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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