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鄭文, 미상~1106년 1월 9일(음력 1105년 12월 3일)[1])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다. 초계 정씨(草溪 鄭氏)의 시조인 중추사(中樞使)·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정배걸(鄭倍傑)의 아들이다. 자는 의덕(懿德)이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생애[2] 편집

1051년(문종 5) 아버지 정배걸(鄭倍傑)과 어머니인 최씨(崔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나이 겨우 15~16세에 벌써 숙성하여 의젓한 사람 같았으며, 문종(文宗) 때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해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를 지었는데,

만물이 시들어진다면 나는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베풀 것이요,
풍속이 흉완해진다면 나는 천둥과 벼락같은 노여움을 내리리라.

라는 구절을 본 왕이 이를 칭찬하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국원공의 녹사가 되고 국원공이 宣宗(선종)으로 즉위하자, 直翰林院(직한림원) 겸 四門助敎(사문조교)로 발탁되었다. 곧이어 右拾遺(우습유)로 전임되었으나 臺諫(대간)이 정문의 외조부가 處仁部曲(처인부곡) 출신이므로 諫官(간관)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殿中內給事(전중내급사)·知制誥(지제고)로 고쳐 임명되었다.[3]

그 뒤 知開城府事(지개성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刑部員外郞(형부원외랑)이 되었다. 숙종 9년(1104년) 2월 翰林學士(한림학사)로서 知貢擧(지공거)가 되어 24명의 진사를 선발하였고[4] 같은 해 7월 秘書監(비서감)으로서 중추원사 崔弘嗣(최홍사)와 함께 사은사로 송나라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받은 金帛(금백)을 종자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남은 것으로는 서적만을 사오니 송나라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감탄하였다. 숙종 11년(1106년) 刑部尙書(형부상서), 政堂文學(정당문학) 겸 太子賓客(태자빈객)이 되고 예종 즉위 후 檢校司空(검교사공), 禮部尙書(예부상서)가 더해졌다. 같은 해 12월에 조정에서 근무하던 중 갑자기 병이 나서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는데 왕이 內醫(내의)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으나 병이 위중해 지자 特進(특진) 左僕射(좌복야) 參知政事(참지정사)를 내렸다. 아들은 鄭復公(정복공)·鄭復卿(정복경)·鄭復儒(정복유)이다.

상훈과 추모 편집

〈정복경 묘지명〉에 따르면 사후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가족관계 편집

  • 아버지: 정배걸(鄭倍傑)
  • 어머니: 최씨(崔氏)
  • 장인: 김의선(金義先) 호부시랑. 태자태보(太子太保) 추증.
    • 아들 : 정복공(鄭復公) 태중대부,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 아들 : 정복경(鄭復卿) 합문지후, 호부원외랑, 예부원외랑,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을 지냈다.
    • 아들 : 정복유(鄭復儒)
    • 딸: 평상군부인 정씨(鄭氏)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 즉위년(1105년) 12월 3일(병인)
  2. 이 내용은 《고려사》 권95, 〈열전〉8, 정문을 근거로 정리한 것이다.
  3. 우습유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정6품의 간관직(諫官職)이다. 부곡(部曲) 출신의 사람은 관직 진출 등에서 많은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정문이 외조부가 처인부곡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직을 받지 못한 것이다.
  4. 고려사 숙종 9년 2월 翰林學士 鄭文이 지공거가 되고 禮部侍郞 劉載가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다. 태자에게 명하여 覆試를 치르게 하고 조서를 내려 乙科에 宋瑋(송위) 등 3명, 丙科 8명, 同進士 16명, 明經 2명, 恩賜 5명에게 급제를 주다. 이때 같이 급제한 사람은 중서시랑문하평장사를 지낸 韓惟忠(한유충)과 검교태자태부로 치사한 安稷崇(안직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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