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룡(鄭芝龍, 1604년~1661년)은 중국 명나라의 상인, 해적, 군인, 정치가로써, 대만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동녕국을 세운 정성공의 아버지이다.[1]

정지룡
鄭芝龍
18세기 출판된《대만외기》에 그려진 정지룡의 초상화
18세기 출판된《대만외기》에 그려진 정지룡의 초상화
로마자 표기 Zheng Zhilong
세례명 니콜라스 가스파르드 이콴
출생일 1604년
출생지 명나라 복건성 남안현
사망일 1661년
사망지 청나라 북경
국적 명나라 출생, 청나라로 귀순
작위 남안백, 평노후
배우자 다카와 미쓰
자녀 정성공
종교 천주교
충성 대상
복무 명군청군
17세기 네덜란드령 포르모사(현재 대만)에서 그린 정지룡(Yguan, 一官, 일관)과 그의 아들 정성공(Koxinga, 國姓爺, 국성야)
바다괴물에게 포를 쏘는 정지룡. 만물회본대전집(万物絵本大全図)에 실린 19세기 가쓰시카 후쿠사이(葛飾北斎)의 그림

1000척이나 되는 선단을 이끌면서 다른 해상집단, 중국 명나라 관헌, 네덜란드와 격렬한 해전을 벌렸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한편으론 정지룡을 통해 중국 물건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1628년 명나라가 정지룡을 제독에 임명하자, 그는 중국연안을 완전히 장악하였다.[2]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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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룡은 중국 명나라 복건성 남안현(南安縣)에 자리 잡은 정사표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젊은 시절 계모와 정을 통하여, 포루투갈의 식민지인 마카오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외가의 도움으로 상단에서 포르투갈 상인과 무역을 하던 정지룡은 다시 필리핀을 거점으로 동아시아와 무역을 하던 대상 이단(李旦)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어느 날, 이단의 상단이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平戶)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는데, 정지룡은 사무라이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이들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 정성공이다. [4]

실력자로 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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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룡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샤먼(厦門)으로 가서 집안의 가장 자리를 꿰찼고, 1625년 이단이 죽자 상단을 장악하기 위해 싸운다. 이 과정에서 조직한 무장선단을 이용하여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는 등 해적질을 시작했다. 1626년에는 재물로 네덜란드인의 환심을 사서, 대만복건성의 무역항로까지 장악하게 된다.[5]

1627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는 정지룡에게 칙서를 내려서, 나라의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에 임명했다. 1628년에는 청나라가 초무(招撫)라는 벼슬을 주었다.[6]

청나라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하고 삼촌인 도르곤(多爾袞)이 실권을 잡았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 숭정제는 자결했다. 1643년 명나라 오삼계(吳三桂)는 청나라에 산해관을 열어주고 투항했다. 명나라 황족들은 남쪽에 남명(南明)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홍광제(弘光帝)를 황제로 올렸다. 홍광제는 정지룡에게 남안백(南安伯)이라는 벼슬을 내려서, 남경 방어를 맡겼다.[7]

그러나 남명 정권은 청나라에 밀려서 정지룡의 근거지인 복건성까지 내려왔고, 홍광제는 죽고 융무제(隆武帝)가 새로 즉위했다. 또한 정지룡은 평노후라는 작위를 받고, 3개의 군사부처 통솔권까지 가지게 되었다.[8]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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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인 볼로를 정남대장군에 임명하고, 남명 토벌을 명령했다. 남명정권은 군사력은 정지룡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볼로는 정지룡에게 은밀한 제의를 했다. 투항하고 변발만 하면, 현재 정지룡이 가지고 있는 영지와 부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편지를 보내서 청나라에 투항하여 가문을 지킬 뜻을 밝혔지만, 정성공은 남명을 배신하지 않기로 했다.[9]

정지룡은 자신의 노모와 부인 그리고 흑인 호위부대만 이끌로 복건성 복주에서 청나라 장군 볼로를 기다렸다. 볼로는 정지룡의 동생들과 아들 정성공이 없자 짜증을 내며, 그를 베이징으로 압송해 가버렸다. 정지룡은 베이징에서 포로와 다름없이 지냈다.[1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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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정지룡과 그의 친척들을 이용하여 정성공을 회유했지만 모두 실패했다.[11]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자, 청나라 순치제는 예전에 정성공의 부하였던 황오를 불러 정성공을 멸한 방도를 물었다. 황오는 정지룡을 처형하여 정성공이 일족과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고, 정지룡 가문의 선산을 파괴하며, 투항자에게 두둑한 보상을 내리고, 바다를 통제하는 해금령을 내리라고 하였다.[12]

결국, 정지룡은 1661년 북경에서 처형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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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 기협 (2023년 10월 27일). “청나라·일본·국민당의 잇단 지배, 타이완이 버틴 힘은?”. 《더 중앙(The JoongAng)》. 중앙일보사.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해적’의 진면목을 보여준 인물이다 
  2. 서, 영교 (2008년 11월 23일). “전쟁과 시장 <45> 정지룡과 누르하치”. 《국제신문》. 국제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정지룡이다. 그는 다른 해상집단을 습격하여 세력 확대를 했고, 명 관헌이나 네덜란드 선단과도 격렬한 해전을 벌였고, 1000척이나 되는 선단을 이끌고 중국연안을 지배했다. 그러자 네덜란드도 그와 손을 잡고 중국 상품의 입수를 꾀하였고, 1628년 명 조정은 그를 제독에 임명했다. 관군이 된 정지룡 세력은 중국연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3.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정지룡의 부친 정사표는 복건에 자리 잡고 남안현(南安縣)에 기거했다 
  4. 김, 현민 (2019년 6월 1일). “대만 건국자 정성공①…아버지 정지룡의 반역”. 《아틀라스(Atlasnews)》. 아틀라스뉴스.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계모와 잠자리를 한 패륜을 저질러 아버지에게 쫓기듯 집을 뛰쳐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마카오(澳門)였다. ~~~ 그는 그곳에서 상업을 하던 외조부를 찾아가 기숙하며 일을 도왔다. ~~~ 외가의 상단과 거래하던 또다른 상단을 찾아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 새로 들어간 상단의 주인은 이단(李旦)이라는 자로, 필리핀에 거주하면서 일본과 중국해안, 대만을 오가며 밀수업을 하던 큰 무역상이었다. ~~~ 이단의 상단에서 활동하던 어느날, 정지룡은 일본 나가사키현 북서부 히라도(平戶)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한 여인에게 첫눈에 끌렸다. 이름은 다가와(田川)였다. 다가와는 일본 큐슈지방의 한 영주를 받드는 사무라이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로, 그날 연회에 시중을 들기 위해 나왔다. 다가와는 정지룡보다 한 살 더 많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두 남녀가 비공식적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정성공이다. 
  5. 김, 현민 (2019년 6월 1일). “대만 건국자 정성공①…아버지 정지룡의 반역”. 《아틀라스(Atlasnews)》. 아틀라스뉴스.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그러던 중 정지룡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계모와 정을 통한 죄로 집을 떠났던 정지룡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인 샤먼(厦門)으로 들어가 가장 자리를 꿰어 찼다. ~~~ 그러던 중에 1625년 8월 12일 정지룡의 보스 이단이 히라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지룡은 이단 상단을 장악하기 위해 반대파들과 전쟁에 돌입했다. ~~~ 그는 마닐라로 가는 스페인 선박을 나포해 화물과 보화를 탈취했다. 해가 갈수록 정지룡의 해적질은 멋진 사업이 되었다. 1626년에 정지룡은 자신의 뒤를 돌봐준 네덜란드인에게 2만8,000냥 상당의 도자기와 물자가 가득 실린 선박 9척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대만~푸젠성 사이의 항로를 장악하게 된다. 
  6.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1627년 명의 숭정제(崇禎帝)는 사신을 보내 정지룡에게 칙서를 내렸다. “그대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사(赦)할 것을 명하니…그 은혜를 받아 전 해역을 통제하는 도독으로 임명하노라.” ~~~ 이로부터 정지룡은 중국 연안의 전 해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 1628년 청 조정은 정지룡에게 초무(招撫)라는 벼슬을 내렸다. 
  7.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청나라 순치제(順治帝)가 5살에 황제로 즉위하자, 삼촌인 도르곤(多爾袞)이 섭정을 맡아 실권을 행사했다.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난을 일으킨 이자성에 나라를 내어주고 자결했다. (1643년) 명나라 유신 오삼계는(吳三桂)는 도르곤에게 산해관을 열어주고 청군과 함께 이자성의 무리들을 쫓아 갔다. 명나라의 황족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다시 일으키니 남명(南明)이라 했다. 남명 정권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정지룡이었다. ~~~ 남명 정권을 수립한 홍광제(弘光帝)는 명의 유신들에게 새로운 귀족과 장수들을 임명하면서, 정지룡에겐 남안백(南安伯)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남경 방어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남경은 양쯔강을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하지만 남경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8.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남명의 조정은 더 남하해 정지룡의 거점인 푸젠성으로 이동해왔다. 홍광제는 사망하고 융무제(隆武帝)가 새로 즉위했다. 푸젠성으로 이동한 남명 정권은 정씨에게 더 매달렸다. 홍광제는 정지룡에게 평노후라는 작위를 봉하고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3개 부처의 통솔권을 주었다. 
  9.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1646년 섭정왕 도르곤은 조카 볼로를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남명정권 잔당을 토벌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볼로에겐 푸젠성에 남아있는 정씨 세력만 제거하면 숙원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고, 정지룡에게 싸우지 말자고 제의했다. 정지룡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허울만 남은 남명정권의 융무제에 충성을 하느냐, 투항해 가문을 지키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 청나라에 투항할 경우, 변발만 하면 끝이다. 볼로는 항복을 하면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고 중국 남동해안의 실력자 지위를 유지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때 정성공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중원에서 푸젠성으로 내려오는 길목인 선하령(仙霞嶺) 을 지키다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지룡은 “나는 황제폐하가 나라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 … 헛되이 저항해 보아야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나는 볼로와 협상하여 우리 가문 사람들이 모두 양호한 대우를 받게 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고 썼다. 정성공도 고민했다.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 나라를 지킬 것인가. 충(忠)과 효(孝)가 배치되는 그 순간에 정성공은 충(忠)을 따르기로 했다. 
  10.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정지룡(鄭芝龍)은 명나라에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 의사를 밝혔다. 정지룡은 푸젠(福建)성의 수도 푸저우(福州)에 가서 청나라 장군 볼로를 기다렸다. 볼로는 정지룡이 흑인부대를 거느리고 노모, 부인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아들과 동생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 청나라 장군은 짜증을 내고 정지룡을 베이징으로 모시라고 명령을 내렸다. 말이 모시는 것이지, 살제로는 압송이나 다름없었다. 흑인부대와 청군 사이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정지룡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11.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아버지는 설득하고, 아들은 거절하고, 그렇게 8년이 지났다. 정지룡에 대한 만주족의 눈길이 싸늘해 져갔다. 정지룡은 넷째아들 정세도를 푸젠성으로 보냈다. 이복동생인 정세도는 형의 발 아래 엎드려 가문의 안위를 지켜달라고 애원했지만, 정성공은 화를 내며 내쫓았다. 삼촌도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왔지만, 정성공은 물리쳤다. 
  12. 정, 길선 (2022년 8월 22일). “정길선의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 바다의 왕자 정지룡(鄭芝龍)의 이야기와 정성공(鄭成功)의 유년시절”. 《참한역사신문》. 참한역사신문. 2023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이징에선 한때 정성공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황오란 자가 청조가 정성공에게 주기로 한 해징공이란 직책을 얻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치제가 그를 불렀다. 정씨 군대를 박멸할 아이디어를 내라는 것이었다. 황오는 정성공을 너무나도 잘 알있다. 그는 정성공을 멸할 방도를 제시했다. 첫째, 아버지 정지룡을 처형해 정성공이 일족과의 관계를 차단하라는 것이다. 둘째, 정씨 가문의 선산을 파괴할 것, 셋째, 투항자에게 두둑한 보상을 내릴 것. 순치제는 여기까지 시큰둥했다. 네 번째 황오의 계책은 해금령(海禁令)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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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ements, Jonathan (2004). 《Coxinga and the Fall of the Ming Dynasty》. Stroud: Sutton Publishing. ISBN 9780750932691. OCLC 232532621. 
  • Manthorpe, Jonathan (2005). 《Forbidden Nation: A History of Taiwan》. New York: Palgrave Macmillan. ISBN 9781403969811. OCLC 58720732. 
  • Michael, Franz (1942). 《The Origin of Manchu Rule in China》. Baltimore. OCLC 582266326. 
  • Andrade, Tonio (2004). “The Company's Chinese Pirates: How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Tried to Lead a Coalition of Pirates to War against China, 1621-1662”. 《Journal of World History》 15 (4): 415–444. doi:10.1353/jwh.2005.0124. JSTOR 20079290. S2CID 144329219. Project MUSE 182472 ProQuest 22523617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Hummel, Arthur W. Sr., 편집. (1943). 〈Chêng Chih-lung〉. 《ECCP》. 미국 정부 인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