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휘

정휘(鄭暉, 1305년[1] ~ ?)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희계(鄭熙啓)의 아버지이다.
생애
편집일찍이 원의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을 역임했으나[2],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할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공민왕(恭愍王)의 반원 정책에 동조한 듯하다.
1358년(공민왕 7)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고, 같은 해 삭방도군민만호부(朔方道軍民萬戶府)의 만호(萬戶)를 겸했다가,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는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에 임명되었다.[3]
이후 홍주목사(洪州牧使)를 거쳤다가[4],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고[5],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6]
가족 관계
편집각주
편집- ↑ 『목은집』에 의하면 1304년(충렬왕 30) 생인 염제신(廉悌臣)·윤환(尹桓)보다 1살 아래였다고 한다.
- ↑ 『고려사』 「정지상전」
- ↑ 『고려사』 「공민왕세가」
- ↑ 『고려사』 「김방경전」
- ↑ 『태조실록』
- ↑ 『목은집』
- ↑ 가 나 다 라 『씨족원류』
- ↑ 삼사에는 정랑이란 관직이 없었다. 정랑과 같은 정5품 관직인 삼사판관(三司判官)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 ↑ 『김심 묘지명』에 의하면, 1339년(충숙왕 복위 8) 당시 김심의 딸 7명 중 막내딸만이 시집가지 않았다. 『씨족원류』와 종합해 보면, 바로 이 딸이 정휘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