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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일제강점기의 정당이다. 1929년 남만주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목차

조선혁명당의 결성편집

1928년부터 1929년 사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단체들을 단일대오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전개되면서 통합의 노력이 '협의회'파와 '촉성회'파로 대립된 가운데, 양 진영이 '협의회'파의 국민부와 '촉성회'파의 혁신의회로 정립되었다.

이후 국민부는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유지하면서 한인사회의 자치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오다가 1929년[1][2][3][4]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5]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이미 당으로서의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혁명당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당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

그해 12월에 조선혁명당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위임받아 국민부의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당 예하에 편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 국민부가 민정을 담당하고 조선혁명군이 군사활동을 맡는, 당.정.군 삼위일체로 완성된 체제를 구현하였다.

조선혁명당 조직편집

조선혁명당의 초기 진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

이탁, 최동오, 현익철, 유동열(柳東悅), 이일세, 고할신, 김이대, 이웅, 이동산(李東山), 현정경(향), 이동림, 김돈, 김탁(金澤), 고이허, 이진탁(李辰卓), 문시영(文始榮), 김안보(金安保), 김진호, 안홍, 강제하(康濟河), 장승언, 장세용(張世庸), 김석하(金錫河) 등 23명.

조선혁명당은 7부, 3위원회를 두었으며, 군사위원회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국민부와의 관계편집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이 조선혁명당의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이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6][7]

결국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한 유일당과 행정부의 관계였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사회의 자치행정기관으로서 그 조직과 운영이 조선혁명당의 영도 아래에 놓이었다.

조선혁명군과의 관계편집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다. 이후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 산하로 이관되었다.

조선혁명군은 그 조직과 운영이 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에 놓여, 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당군으로 활동하는 체제였다.

함께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한민족독립운동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주편집

  1. 조선혁명당의 결성 시기에 관하여 "최형우(崔衡宇)는, 1929년 3월 1일 만주 조선민족운동의 총본영 조선혁명당은 기미운동(己未運動)이 있은 지 만 10년 경술국치(庚戌國辱)를 당한 지 19년 이보다 더 소급하야 정미(丁未) 이래 21년간 남북만, 시베리아〔西北里亞〕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자주의 숭고한 이념과 결심 밑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대도를 걸어오던 의열지사(義烈志士)와 혁명동지들의 결속으로 사회의 진운에 발걸음을 맞추어 130만여 평방 키로란 만주의 광범한 지역 우에 100만의 내부내자(乃父乃子)를 포옹하고 무궁화(無窮花) 아름다운 삼천리고원(三千里故園)을 바라보며 역사적 거보(巨步)를 내여듸디였다."라고 하여 조선혁명당의 창립시기를 1929년 3월이라 하고 있다. 이는 채근식의 기록과 일치한다.
  2. 채근식은 국민부의 창립 시기를 1928년 5월이라 보고 있으며, 조선혁명당에 대해서는, "민족혁명자들의 비원(悲願)인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1929년 3월 1일 혁명거두(革命巨頭)들은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同)의 국민부 사무소에 모였다. 남만에 있어서는 대소독립단체가 대부분 국민부로 통일흡수되어 국민부는 유일한 혁명군정부로서 활약을 하고 있는데 이 혁명정부를 지지육성하는 유일당이 필요케 되었다. ……중앙당부에는 7부 3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위원회하에 국민군부대를 당군으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라 칭하고 당의 명령을 받게 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3. 한편 홍영도(洪永道)의 기록에서는,"처음부터 민족운동에 헌신분투하던 많은 혁명동지들 중에는 민족단일의 총지휘기관인 중심조직의 필요를 느껴오던 바 4262년 기사(己巳:1929) 9월에 길림성 우마항 국민부 주길판사실(駐吉辦事室)에서 이탁(李沰) 이하 20여 명이 회집하여 엄숙한 맹서 하에 새로 제정된 선언·강령을 발포함과 함께 한 개의 새로운 조직체가 결성되니 이것이 곧 조선혁명당이었다."라고 하여 9월 창당을 주장하고 있다.
  4. 그러나 1928년 5월이라면 정의부의 주도에 의해 전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이므로 이때 국민부는 창립될 수 없는 시기였다. 이때는 정의부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중앙의회를 통해 유일당 결성을 위해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유일당 결성 방법으로 협의회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부는 협의회 측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의해 1929년 3월에 창설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창설된 조선혁명당은 1929년 3월에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조선혁명당이 1929년 9월에 창설되었다는 기록이 문제인데, 이는 국민부 중앙의회의 개최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즉 1929년 9월에 제1회 국민부 중앙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유일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측의 기록에 나타난 중앙의회 결의사항을 보면, “대체로 혁명과 자치를 분리하여 혁명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위양(委讓)하고, 국민부는 재만조선인의 자치기관으로서 오로지 그 방면을 담당하기로 하고, 강령 및 헌장을 개정하여 중앙기관 중 군사부를 폐지하고 종래의 조선혁명군은 유일당 조직동맹이 지도하게 하며 국민부의 중앙에 새로이 공안부를 설치하고 각지의 주요 지점에 경호국 또는 경호분국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군사행동은 분리시키기로 하였으나 사법 및 경찰에 관한 사무는 여전히 국민부에서 집행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라고 하여 9월에 유일당이 결성되었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혁명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이양하여 창당을 위한 기반조성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혁명당은 적어도 1929년 9월 이후에 창설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월에 창당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5. 조선혁명당은 1926년에 결성되었던 고려혁명당을 계승한 성격이 강하다. 정의부 중심의 구성인원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활동지역이 겹쳐 고려혁명당 해소 이후 그 인맥들이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거쳐 조선혁명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6.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에 대해 채근식은, "양 단체는 표리일체의 단체이나 조선혁명당의 행정기관인 국민부에 대한 명령권은 지대(至大)하여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이 지시하는 행정사항을 표면에 나타나 처리하는 데 불과하나 일당독재국인 소련이나 중국 국민정부에서만 그 예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7. 홍영도는, "조선혁명당은 완전히 이당치국의 성격을 구비한 민족진영의 유일당으로서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부문을 지도통어하기로 되었다. 더우기 국민부와는 그 구성인물로든지 그 내용정신으로든지 완전히 표리일체의 자매기관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지도에 의하여 국민부는 지방자치 행정에 전력하였던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