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우원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11월) |
주우원(朱祐杬, 성화(成化) 12년 7월 2일(1476년 7월 22일)[1] ~ 정덕(正德) 14년 6월 17일(1519년 7월 13일)[2])은 명나라의 황족이자 추존 황제로, 본래의 작위는 흥헌왕(興獻王)이다. 헌종 성화제의 서4남이자 효종 홍치제의 이복 동생이며, 세종 가정제의 생부이다. 묘호는 예종(睿宗), 시호는 헌황제(獻皇帝), 정식 시호는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간경문헌황제(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簡敬文獻皇帝)로 추존되었다.
![]() | |
---|---|
![]() | |
지위 | |
명나라의 추존 황제 | |
신상정보 | |
부친 | 헌종 |
모친 | 효혜황후 소씨 |
배우자 | 자효헌황후 장씨 |
주우원의 둘째아들 주후총(朱厚熜, 훗날의 가정제)은 후사가 없던 사촌형 무종 정덕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생애편집
1487년 번국인 흥국의 왕에 봉작되었다.
첫 아들 주후희를 보았으나 주후희는 곧 사망했고, 둘째 아들 주후총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1519년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다. 6년 뒤 그의 조카 정덕제는 남경에서 물놀이를 하다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정덕제에게 후사가 없었기에 사촌동생인 그의 아들 주후총이 황위를 계승하였다.
사후편집
추존 논란편집
그러나 가정제 즉위 초에 입경의례(入京儀禮)와 생부인 흥헌왕에 대한 존호 및 제사 등의 문제로 오랜 기간을 대신들과의 갈등에 소비하였으며, 황제의 생부 추존 문제로 시작된 이 사건은 세종 치세에 정치의 문란과 부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논란은 3년 만에 종결된다.
시호, 묘호편집
가정제가 황제로 추존하였고, 흥헌제(興獻帝)로 추존하게 되었고, 다시 제대로 제호로 고쳐서 난 후에 가상해서 공예연인관목순성헌황제(恭睿淵仁寬穆純聖獻皇帝)로 추존하였다. 다시 묘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가상하여 묘호는 예종(睿宗)으로, 시호는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간경문헌황제(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簡敬文獻皇帝)로 정식으로 추존되었다.
가족관계편집
조부모와 부모편집
- 조부 : 영종 예황제(英宗 睿皇帝) 주기진(朱祁鎭)
- 조모 : 효숙황후 주씨(孝肅皇后 周氏)
- 아버지 : 헌종 성화순황제 (憲宗 成化純皇帝) 주견심(朱見深)
- 어머니 : 효혜황후 소씨(孝惠皇后 邵氏)
후비편집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별칭 | 비고 |
---|---|---|---|---|---|---|---|
흥왕비(興王妃) | 자효헌황후 (慈孝獻皇后) |
장씨(蔣氏) | (추존) | 1478년 ~ 1538년 | 옥전백(玉田伯) 장효(蔣斅) 옥전백부인(玉田伯夫人) |
흥헌후(興獻后) 흥국태후(興國太后)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장성황태후(章聖皇太后) |
사후 황후로 추존. |
숙비(貴妃) | 온정숙비 (溫靜淑妃) |
왕씨(王氏) | 1430년 ~ 1504년 |
황자편집
(모두 자효헌황후 소생.)
-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자식 | 별칭 | 비고 |
---|---|---|---|---|---|---|---|---|
장남 | 악왕(岳王) | 회(懷) | 주후희(朱厚熙) | 1500년 | 자효헌황후 장씨 | 악회헌왕(岳懷獻王) | 요절함. | |
차남 | 흥왕(興王) | 주후총(朱厚熜) | 1507년 ~ 1567년 | 자효헌황후 장씨 | 8남 5녀 | 제11대 황제 가정제(嘉靖帝). |
황녀편집
- |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별칭 | 비고 |
---|---|---|---|---|---|---|---|
장녀 | 장녕장공주(長寧長公主) | 1501년 ~ 1504년 | 자효헌황후 장씨 | 요절함. | |||
차녀 | 선화장공주(善化長公主) | 1503년 ~ 1512년 | 온정숙비 왕씨 | 조졸함. | |||
3녀 | 영복장공주(永福長公主) | ? ~ 1525년 | 자효헌황후 장씨 | 영간백(榮簡伯) 우경화(鄔景和) | 장수군주(長壽郡主) | ||
4녀 | 영순장공주(永淳長公主) | 1510년 ~ 1540년 | 자효헌황후 장씨 | 사소(謝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