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년: 미상.
- 1005년(목종 8): 장삿배를 따라서 옴. 그의 재주를 눈여겨본 채충순이 왕에게 건의해 예빈주부(禮賓主簿)로 임명받음.[1][2] 그 뒤 몇 개월도 안 되어 습유(拾遺) 벼슬을 받았고 마침내 제고(制誥)를 받음.[2]
- 1011년(현종 2): 현종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갔을 때 하공진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뿔뿔이 도망쳤지만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 채충순(蔡忠順), 김응인(金應仁) 등과 함께 왕의 곁을 지킴.[3] 이 공으로 그는 몇 단계를 뛰어 넘어 예부시랑(禮部侍郎), 중추원(中樞院) 직학사(直學士)가 됨.[4][2] 또한 과거 시험에 호명(糊名)[5] 방식을 채택할 것을 건의함.[6]
- 1013년(현종 4): 수찬관에 임명됨.[7]
- 1014년(현종 5): 지공거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함.[8]
- 1015년(현종 6): 〈본국 입송 진봉 기거 표〉를 지음.[9]
- 1018년(현종 9): 우상시(右常侍)가 됨.[10]
- 1021년(현종 12) 6월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가 되었으며,[11], 같은 달에 숭문보국공신(崇文輔國功臣)·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상주국(上柱國)·해남현(海南縣)[12] 개국남(開國男)으로 봉해졌고, 식읍 3백 호를 받음.[13][2] 8월에는 〈현화사비〉의 비문을 지음.[14]
- 1022년(현종 13):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됨.[15]
- 1024년(현종 15): 7월 2일(음력 5월 24일)에 죽음.[16]
- 〈본국 입송 진봉 기거 표〉(《동인지문 사륙》에 수록)
- 〈진봉표〉(위와 같음)
- 〈현화사비〉
- ↑ 《고려사》 권3, 〈세가〉3, 목종 8년(1005년)
- ↑ 가 나 다 라 《고려사》 권94, 〈열전〉7, 주저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년) 1월 3일(정축)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년) 1월 29일(계묘)
- ↑ 과거 시험지에 답을 쓴 사람을 알 수 없게 하는 것.
- ↑ 《고려사》 권73, 〈선거지〉1, [과목]1, 현종 2년(1011년). 단 여기서 '起'는 '佇'의 잘못이다.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4년(1013년) 9월 27일(병진)
- ↑ 《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현종 5년(1014년) 4월
- ↑ 이 표문은 《동인지문 사륙》 권2에 실려 있다.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9년(1018년) 6월 8일(기해)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1021년) 6월 23일(정묘)
- ↑ 〈현화사비〉에는 汝南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주마뎬시 루난현이다. 여남 주씨(汝南 周氏)는 중국에서 이름난 사람을 다수 배출했다. 여남 주씨 참조.
- ↑ 《고려사절요》 권3, 현종 12년(1021년) 6월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1021년) 8월 16일(기미)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3년(1022년) 10월 25일(신유)
- ↑ 《고려사》 권5, 〈세가〉5, 현종 15년(1024년) 5월 24일(경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