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죽지(竹旨, ?~?)는 신라의 대신이자, 화랑 출신 장군이다. 김유신과 함께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고,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정벌에도 참전하였으며 재상을 지냈다. 화랑 득오가 그를 흠모하여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가 전해진다.
죽지
竹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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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1대 중시 | |
재임 | 651년~655년 |
후임 | 문충 |
국왕 | 신라 태종무열왕 |
이름 | |
별호 | 죽만(竹曼), 지관(智官), 죽지랑(竹旨郞)[1]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국적 | 신라 |
성별 | 남성 |
부친 | 술종(述宗) |
군사 경력 | |
복무 | 신라군 |
주요 참전 | 제3차 고구려-당 전쟁 나당 전쟁 |
생애
편집술종이 삭주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중 죽지령(竹旨嶺)[주 1]이라는 곳에서 한 거사(居士)를 만났고 부임한 지 1달이 되었을 즈음에 거사가 죽었는데, 곧 김술종의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는데 술종공이 이를 거사가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는 거사와 처음 만났던 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죽지라 했다.[2]
죽지는 이후 649년(진덕여왕 3년) 8월에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진춘, 천존 등과 함께 김유신의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도살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3] 651년(진덕여왕 5년) 2월에는 새로 설치된 집사부에 파진찬 관등으로 중시가 되어[4] 655년(태종무열왕 2년) 1월까지[5]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4] 661년(문무왕 원년) 4월에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으나,[6] 7월에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7] 668년(문무왕 8년) 6월에는 이찬 관등으로 진춘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에 임명되어[8] 같은해 10월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인정받아 각간 관등이 됐다.[9]
문무왕 10년(670) 7월에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10] 문무왕 11년(671)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의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보급을 차단했으며[11] 당나라 군사와 석성[주 2]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12] 이후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하였다고 하였다.[2]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편집효소왕대 모량리(牟粱)에서 아찬 관등을 지내던 익선(益宣)은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주 3]를 차출하여 부역시켰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고,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13]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1] 이 일로 인해 모량리 사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13] 후에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며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得烏去隱春皆林米 간 봄 그리워하매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임께서 더) 못 살으사 울어 설워하더이다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애닯음 나토시던 모습이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가이더이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이킬 새
逢烏支惡知作乎下是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봊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 득오
관련작품
편집가계
편집- 아버지: 김술종 (金述宗)
- 본인 : 죽지 (竹旨)
주해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일연.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竹㫖郎) 죽만랑의 낭도 득오가 모량리 익선의 부역에 동원되다〉. 《三國遺事》 [삼국유사]. 권2 (卷 第二) 기이2(紀異第二).
- ↑ 가 나 일연.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竹㫖郎) 죽지랑의 신이한 탄생담〉. 《三國遺事》 [삼국유사]. 권2 (卷 第二) 기이2(紀異第二).
- ↑ 김부식 (1145년). 〈진덕왕(眞德王) 3년(三年) 가을(秋) 8월(八月) 백제가 일곱 성을 함락시키다 (음력 649년 8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5권(卷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 ↑ 가 나 김부식 (1145년). 〈진덕왕(眞德王) 5년(五年) 봄(春) 2월(二月)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다 (음력 651년 2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5권(卷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 ↑ 김부식 (1145년).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2년(二年) 봄(春) 1월(一月)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다(음력 655년 1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5권(卷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 ↑ 김부식 (1145년).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8년(八年) 여름(夏) 4월(四月) 19일(十九日) 군사를 돌이키다 (음력 661년 4월 19일)〉.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5권(卷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1년(一年) 가을(秋) 7월(七月) 17일(十七日) 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음력 661년 7월 17일)〉.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6권(卷第六)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8년(八年) 여름(夏) 6월(六月) 21일(二十一日)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음력 668년 6월 21일〉.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6권(卷第六)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8년(八年) 겨울(冬) 10월(十月) 22일(二十二日)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음력 668년 10월 22일)〉.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6권(卷第六)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10년(十年) 가을(秋) 7월(七月) 백제의 남은 무리를 여러 곳에서 물리치다 (음력 670년 7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6권(卷第六) 신라본기(新羅本紀) 제6(第六).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11년(十一年) 여름(夏) 6월(六月) 장군 죽지 등이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다 (음력 670년 6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7권(卷第七) 신라본기(新羅本紀) 제7(第七).
- ↑ 김부식 (1145년). 〈문무왕(文武王) 11년(十一年) 여름(夏) 6월(六月) 당 군사와 석성에서 싸우다 (음력 671년 6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7권(卷第七) 신라본기(新羅本紀) 제7(第七).
- ↑ 가 나 일연. 〈효소왕대 죽지랑(孝昭王代竹㫖郎) 익선의 어리석음으로 모량리민들이 벼슬에서 쫓겨나다〉. 《三國遺事》 [삼국유사]. 권2 (卷 第二) 기이2(紀異第二).
- ↑ 관리자 (2015년 9월 12일). “오페라 '신라향가 죽지랑' 공연”.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년 3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3월 19일에 확인함.
제1대 집사부의 중시 651년 2월–655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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