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김씨(晉州 金氏)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진주 김씨
晉州 金氏
나라한국
관향경상남도 진주시
시조김추(金錘)
김원술(金元述)
원시조김알지(金閼智)
집성촌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사곳리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산천리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보명리
평안북도 박천군 동남면 도남동
주요 인물김사성
인구(2015년)22,308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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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김씨(晋州 金氏)는 진주(晋州)를 관향(貫鄕)으로 하고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연원(淵源)을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신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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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추(金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여덟째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삼한찬문공신(三韓贊文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참지부사(參知府使)를 지내고 진성군(晉城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관향(貫鄕)을 진주(晉州)로 삼았다.

가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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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김원술(金元述)는 김유신(金庾信)의 둘째 아들로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했을 때 출전하여 격전 끝에 담릉(淡陵)의 만류로 후퇴하였는데, 왕명을 어기고 가훈(家訓)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용서받지 못하여 태백산에 들어갔다가, 675년매소성(買蘇城)에서 당군(唐軍)을 크게 섬멸하였으나 끝내 어머니의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김원술은 이를 한탄하여 진주(晉州)에서 일생(一生)을 마쳤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다.

두 계통이 발생된 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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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진주 김씨는 시조 김추(金錘)은 신라 대보공(大補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한 후 재취한 낙랑공주 왕씨 사이에 낳은 아들로, 중시조(中始祖)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김무진'(金茂珍)은 시조(始祖) 김추(金錘)의 23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가락계 진주 김씨가 1903년 광무 7년(계묘년)에 중시조(中始祖) '김무진'(金茂珍)을 같이하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게 됨으로써 오늘날 두 계통의 진주 김씨(晋州 金氏)가 전해오게 되었다.[1]

1977년 정사보(丁巳譜. 진주 김씨 진흥군파보)에 의하면, 가락계 진주 김씨의 시조 김원술(金元述)은 가락국 김해 김씨(金海金氏)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3세손 대각간(大角干) 흥무왕(興武王)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으며, 중시조(中始祖)를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김무진(金茂珍)은 시조(始祖) 김원술(金元述)의 20세손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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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晉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렸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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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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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령파(扶寧派): 김중국(金重國)
  • 홍원파(洪原派): 김이(金履)
  • 함열파(咸悦派): 김해용(金海用)
  • 영광파(靈光派): 김약용(金若用)
  • 화순파(和順派): 김이용(金履用)
  • 숙천파(肅川派): 김철(金鐵)
  • 용강파(龍岡派): 김승업(金勝鄴)
  • 영변안주파(寧邊安州派): 김승선(金勝鄯)
  • 강서파(江西派): 김맹정(金孟晶)

가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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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흥파(晉興派): 김양언(金良彦)
  • 논산파(論山派): 김세룡(金世龍)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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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계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수(洙) 락(樂) ○환(煥) 재(在) ○호(鎬) 태(泰) ○식(植) 병(炳) ○기(基) 종(鐘) ○구(求) 동(東) ○열(烈) 요(堯) ○현(鉉) 영(永) ○근(根) 광(光) ○곤(坤) 석(錫)
  • 가락계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53세 54세 55세 56세
재(載) ○희(熙) ○곤(坤) ○호(鎬) ○택(澤) ○순(栒) ○열(烈) 규(奎) ○진(鎭) ○원(源) ○식(植)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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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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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무진(金茂珍):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여러 벼슬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역임하고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 김태(金台): 무진의 맏아들 태(台)는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 김중국(金重國): 조선조에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냄.
  • 김귀민(金貴敏): 호조 참판(戶曹參判)

가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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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우(金天祐): 조선조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한 천우(天祐).
  • 김장련(金長鍊):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김양언(金良彦): 첨정(僉正) 덕수(悳秀)의 아들 양언(良彦)은 광해군(光海君) 때 아버지가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군사를 모아 변방수비에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안주(安州)의 방어전에서 분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뒤에 진흥군(晋興君)으로 추봉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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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관련 문헌 : 함열 · 논산 · 비인 파보(派譜)-1929년 기사보(己巳譜), 1957년 정유보(丁酉譜), 1977년 정사보(丁巳譜)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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