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

카노사의 하인리히 (1862)

카노사의 굴욕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을 말한다.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수 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장악에 성공한후 1084년 로마를 탄환하여 교황을 폐위시키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카노사 굴욕을 세속군주가 굴욕을 맛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한다면 14세기 초에 있었던 '아나니 사건'은 교황이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수 있다.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별궁이 있는 아나니에서 생포된후 로마 귀족가문 출신 '시아라 콜로나'[1]에게 빰을 맞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한달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사건의 전개편집

배경편집

개혁적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재임 초기부터 강력한 교회 개혁과 쇄신운동을 펼쳤는데 당시 세속의 군주가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 즉 서임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독일왕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독일왕 하인리히 4세를 도와주는 귀족이나 사제도 파문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인리히 4세는 계속 대적하고자 했으나 이미 많은 독일 귀족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 움직임이 있었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할수 밖에 없었다.

사건의 경과편집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몰아내려고 오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 했는데 이때 카노사 성의 백작부인 마틸데는 교황을 자신의 성으로 초청하여 하인리히의 공격에 대비한 피난처로 삼게 하고 자신의 성채에서 머물게 했다.[2][3] 마틸데는 서임권 분쟁 때 열열히 교황을 지지한 교황의 절친한 동맹자였다.

한편 하인리히 4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신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반란의 기미가 보이자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것이었다. 그는 쥐라 산맥을 넘자 독일왕이 아니라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을 하고 카노사를 향해 갔다.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옷과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1077년 1월 25일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 성문 앞에 도착했다.

교황은 하인리히를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하인리히는 계속 성문 앞에서 고해복을 입고 금식을 하며 교황의 허가를 기다렸다. 성직자의 기본은 용서를 하는 것이므로 결국 3일 후 1월 28일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성 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했고(일설에 의하면 하인리히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빌었다고 전해짐) 그 날밤 마틸데와 하인리히는 함께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하인리히에 대한 교황의 파문은 종결되었다. 파문이 취소되자 하인리히는 즉시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갔다.

사건 이후편집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는 교황의 사면을 받았지만 독일의 제후들은 라인펠트의 루돌프를 황제로 추대했고 하인리히는 루돌프를 상대로 내전에 돌입했다. 교황 그레고리오는 양측의 중재자로 자임했으나 양쪽으로부터 모두 비난을 받았다. 교황은 1080년 하인리히를 다시 한번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내전에서 승리하여 귀족들을 굴복시키자 파문은 아무런 효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독일내 권력장악에 성공한 하인리히 4세는 1080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쳐부수고 세력을 약화시킨다. 1081년 로마에 도착한후 3년간의 노력끝에 1084년 3월에 로마 탈환에 성공한다.

로마가 정복당하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산탄젤로성[4]으로 피신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라벤나의 주교인 귀베르트를 교황 클레멘스 3세로 하여 새 교황으로 옹립한후 1084년 3월 31일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산탄젤로성으로 은신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 지배자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1084년 5월 로베르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오자 전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신속히 퇴각해 독일로 돌아가 버린다.

로마약탈(1084년)편집

로베르의 군대가 로마로 진입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는 세력과 시가전이 벌어졌으나 교황 구출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 과정중에 노르만족 특유에 방화와 약탈[5]이 자행되며 도시 로마의 피해가 극심하게 발생하고 말았다. 교황과 제휴한 노르만족의 만행에 로마시민들이 분노하였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교황은 로베르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재위기간 동안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원성이 높았던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시민들로 부터 버림을 받은후 1085년 쓸쓸하게 망명지 살레르노에서 병사했다. 하인리히 4세 또한 계속되는 반란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역사적 의미편집

이 사건으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권력이 항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 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기독교에 대한 굴복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게 되었다. 나중에 독일에서 프로이센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바로 이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독일은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천명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일부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간주한다.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단초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일종의 굴복, 복종, 항복을 나타낸다.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go to Canossar"; 독일어: "nach Canossar gehen"; 스웨덴어: "Canossarvandring"; 이탈리아어: "andare a Canossar")은 하기는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출처편집

  • 교황사전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콜로나 가문 출신의 추기경 2명을 면직후 파문하였으며 교황군을 동원하여 콜로나 가문의 성채를 파괴하고 토지를 몰수한바 있다. 로마 귀족 콜로나 가문은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여러가지 일로 대립하며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중 1297년에 콜로나 가문의 지지자들에 의해 교황청 보물 수송마차를 강탈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교황의 조치는 이에 상응하는것이였고 이에 따라 콜로나의 시아라는 교황에 대해 매우 격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2. 당시 교황은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으로 장거리 여행이 어려운상태였다. 독일제후들의 초청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출발한것이 아니다. 로마에서 아우크스부크까지는 1600km가 넘는다.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철에 알프스를 넘어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수가 따른다. 하인리히 4세의 무력도발을 피해 카노사성으로 급히 피신한것이다.
  3. 1985년에 그레고리오 7세 선종 9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유골검사가 실시된바 있다. 이탈리아 의학자들에 의한 검시결과 1077년 당시 교황이 심한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바 있다. 자세한것은 H푸어만의 저서 'The Pope"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4. 산탄젤로성은 베드로 광장에서 약 800m 떨어진 테베레 강변에 위치해 있다. 로마 시내에 위치해 있기에 결코 외딴성이 아니다. 요새화 되어 있는 작은 성이며 베드로 성당에서 부터 비밀통로가 놓여있어 교황에게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이 통로를 통하여 산탄젤로성으로 신속히 대피할수 있게 되어 있다.
  5. 1084년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끌고 온 군대는 바이킹 후손인 노르만족과 사라센인이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이킹족은 북해지역에 해적질을 하던 이들이고 사라센인들은 북아프리카 출신의 해적들중에 남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에 정착한 이들이다. 해적의 후손들 답게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특히 방화를 많이 하여 로마시내의 건물들이 많이 연소되고 무너졌다고 한다. 과거 AD 410년과 AD 455년에 있었던 로마약탈보다도 피해가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