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도 (종교)

태극도(太極道)는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년 ~ 1958년)에 의하여 만들어진 증산계의 종교이다. 1919년 전라북도 정읍(井邑)에서 창시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가 모체이다.

역사편집

창시자인 조철제는 15세 때 항일 투쟁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부친을 따라 그곳에서 살다가 1917년 강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입산수도하여 개안(開眼)이 되었다는 인물이다. 23세에 귀국하여 증산의 유족(대모 권씨, 사모 정씨, 매씨 선돌부인, 무남독녀 강순임)과 함께 1921년 '무극대도'를 만들어 기세를 올리고 개척사업 등 경제기반을 닦았다.

무극대도의 강령은 안심안신(安心安身) 경천수도(敬天修道)이며 도규(道規)에 의한 교체조직도 신태인에 교당이 설립된 후 공포되었다. 그는 신도에게 태을주 등을 읽게 하여 전성기엔 신도수가 10만이 되기도 했었다. 교세의 약화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비롯되고, 1930년에는 함북 무산 국유림을 벌채하기 위해 400여 명의 신도를 보내기도 했으며, 충북 유성에 무극광산(無極鑛山)을 채굴하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약화된 교세를 8·15 이후 부산에서 무극대도를 태극도로 개칭하였다. 조철제(조정산) 사망 이후에는 조철제의 아들인 부산의 조영래(趙永來) 교단과 서울의 박한경(朴漢慶) 교단(대순진리회)으로 분리되었다. 부산의 교단은 감천동에 여전히 남아서 태극도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1] 감천동의 태극도마을(현 감천문화마을)이라는 마을에 교단이 있다.

그래도 대순진리회에서는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증산(姜甑山, 본명 강일순) 상제(上帝)와 태극도의 창시자인 조정산(趙鼎山, 본명 조철제) 도주의 강세일(降世日)과 화천일(化天日)에 모시는 치성을 하고 있다.

비판편집

전라북도 고부 출신의 강일순(姜一淳, 1871년 음력 9월 19일 ~ 1909년 음력 6월 24일)으로부터 생겨난 증산교강일순은 특별히 종파를 만들지 않았고, 오로지 비겁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지상선경(地上仙境)을 열기 위한다는 '천지공사'에만 매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09년 강일순의 사후, 그의 부인인 수부 고판례가 선도교를 만든 것이 증산교의 시초이다. 이후 증산 강일순의 제자이며 고부인측의 측근이었던 차경석이 고판례의 선도교로부터 분리되어서 보천교라는 증산교계열의 최대 종파를 만들었으며 신자간에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 여러 세부 종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편 제자로 있던 인물들이 '천지공사'가르침을 자체적으로 연구하여 종파를 세우는데 바로 정산 조철제가 세운 무극대도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종교를 탄압을 받으며 해체일로에 있다가 광복 이후, 수많은 증산교단들이 다시 부활하여 난맥을 이루는데, 이 중에서 보천교의 신자로서 추정되는 안운산이라는 인물이 강증산의 교리를 연구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운 것이 증산도의 전신이다.

무극대도교는 태극도로 바뀌면서 조정산이 이끌다가 조정산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박한경이라는 인물이 무극도의 계승을 주장하며 조정산의 아들세력(조영래측)과 물리적 마찰을 겪게 된다. 이에 박한경은 부산 태극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새로 포교당을 열고 새 종파를 건립한 것이 바로 대순진리회이다. 대순진리회의 박한경이 사망하자 대순진리회는 또다시 내분을 겪으며 천안측과 여주측의 나누어 대립하였고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완전하게 해결이 안된 상태로 남아있다. 대순진리회의 최대세력은 여주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증산도는 증산교의 도전(교리)에 충실하다고 알려져 있고 증산 강일순만을 상제로서 인정하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증산 강일순 외에 정산 조철제나, 박한경 도전까지도 상제로서 숭배하고 있다. 현재 증산교계열에서는 최대 세력이 대순진리회이기 때문에, 대순진리회는 나머지 다른 증산계로부터 견제 대상으로 되어 있다. 또한 대순진리회는 증산교의 방계 계열로서 교리 자체도 원래의 증산교와는 많이 달라 증산교를 비롯 다른 증산교계열의 견제와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1909년 강증산이 39세의 나이에 죽으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단순한 내용이었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라.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평소에도 늘 혹세무민하지 말라 가르쳤고 병든 것을 낫게 하려고 애쓰던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바램과는 달리 증산교는 여러 파로 갈라져 선도교 · 보천교(普天敎) · 미륵불교(彌勒佛敎) · 제화교(濟化敎) · 태을교(太乙敎) 등 수십 개의 독립교단이 난맥상을 이루며 창설되었고 한때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일부 신자들의 기복적이고 주술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종종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런 지탄을 받는 모습도 일부 남아 있다.[2]

각주편집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 참조
  2. 종교학대사전(1998년 한국사전연구사 출판) 참조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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