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순(姜一淳, 1871년 11월 1일[4]~1909년 8월 9일[5])은 대한제국 시대의 증산교(증산 계열)의 창시자(創始者)이자, 모든 증산도 계파의 개조(開祖)이기도 하고, 그의 관향()은 진주(晉州)로, 강증산(姜甑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진 증산(甑山)은 그의 (號)이며, (字)는 사옥(士玉)이다.

강증산
본명강일순
출생1871년 11월 1일(1871-11-01)
조선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 객망리)
사망1909년 8월 9일(1909-08-09)(37세)
대한제국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거주지대한제국 전라북도 김제군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시)
국적대한제국
민족한민족
활동 기간1901년 9월 19일~1909년 8월 9일
교파증산계열
칭호증산상제(甑山上帝)[1]
구천상제(九天上帝)[2]
배우자장흥 고판례(마지막 3혼)[3]
하동 정치순(첫번째 이혼)
김제 김말순(두번째 이혼)
자녀2남 3녀
(그 중 막내 딸 강순임)
부모강문회(부), 안동 권양덕(모)
친척고덕삼(삼취 장인)
강재득(친남동생)
강선돌(친누이동생)
강보랑(친가 증조부)
강두중(친가 양조부)
강한중(친가 친조부)
차치구(삼취 처이모부)
차경석(삼취 이종처남)
차일혁(방계 처가친척)
차길진(방계 처가친척)
김광배(사돈댁)
웹사이트
강일순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강일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아호(雅號)는 증산(甑山)이며, (字)는 사옥(士玉)이고, 그는 1871년 11월 1일(음력 9월 19일), 조선 시대 말기의 전라도 고부군에서, 강학봉(姜鶴鳳)이라는 아명(兒名)으로 출생하였다. 1877년, 7세 때에 강일순(姜一淳)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는 1900년, 30세 때에 대한제국전라북도김제모악산·완주대원사 등지에서 스스로 깨우쳐 얻은 깨달음 등을 계기로써, 후천개벽·후천선경 등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증산상제(甑山上帝)[6]·구천상제(九天上帝)[7] 등의 칭호(호칭)로 불리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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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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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은 1871년 11월 1일(1871-11-01), 조선 시대의 전라도 고부 출생인데, 그의 아버지는 강문회, 양조부(증산 선생의 양할아버지)는 강두중(증산 선생의 아버지 강문회의 백부이자 양부)이고, 친조부(증산 선생의 친할아버지)는 강한중(증산 선생의 아버지 강문회의 생부)이다. 아버지 강문회1846년생으로, 원래 강한중(姜漢重)의 2남 1녀(3남매) 중 장남(長男, 큰 아들)이자 둘째였었으나, 증산 선생의 그 집안 직계 형제자매들한테, 백부(伯父, 큰아버지)이자, 증산 선생의 직계 집안의 첫째(長男)인즉 강씨 집안의 증조부 강보랑(증산 선생의 증조할아버지)의 장남(長男)이었던 강두중(姜斗重)한테 자식이 없었으므로 강문회(증산 선생의 부친)는 열살때였던, 1855년, 백부 강두중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강일순의 어머니 안동 권씨 권양덕1850년생으로, 안동이 본관이다. 권양덕(증산 선생의 모친)은 천성이 선하고 남의 흉을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안동 권씨 부인 권양덕은, 1866년강문회(증산 강일순의 부친)와 결혼하고 나서, 1870년에 아이가 아직 없었던 권양덕(증산 강일순의 모친)이 잠시 건강이 안좋음으로 인하여 그 친정 본가에 잠시나마 근친할 때에 강씨 집안 친가에서는 강문회(증산 선생의 부친) 선생이 산자락에서 큰 불덩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를 태몽으로 알고 처가로 가 잉태하였다고 한다. 넉 달 이후 권양덕(증산 선생의 모친) 여사 또한 같은 태몽을 꾸었고, 그렇게 열석 달 뒤인 이듬해 1871년 11월 1일에, 증산 강일순조선전라도 고부군(현재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시)의, 친가 양조부 강두중(親家 養祖父 姜斗重)의 본가댁(本家宅)에서, 강문회(父)와 권양덕(母)의 사이에서, 강학봉(姜鶴鳳)이라는 아명(兒名)으로 태어났다고 하며, 1877년강일순(姜一淳)으로 개명(改名)하였다고 한다.

원시반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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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강일순)이, 많은 성씨 가운데 하필 강씨(姜氏)가 성(姓)으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서 설파하기를,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아쉽게도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그 관련된 잔재들이 풍채(風采)ㆍ풍신(風身)ㆍ풍골(風骨)등으로, 그렇게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차라리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나니라"고 직접 말하였다.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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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열다섯살 무렵부터 안으로는 조선 시대 구한 말기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동학운동,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 혼란했던 민심과 속정을 살피고 어루만지고자 유랑을 하였다고 한다.

혼인과 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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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유교(성리학)를 이탈하고, 자신의 철학적으로 증산도교를 창시까지 하게 된 그는 1888년에 3년량 남짓의 유랑을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의 호(號)를 "시루 증, 뫼 산"이라는, 증산(甑山)이라 하고 스물한 살이 되는 1891년하동 정씨였던 1874년생 열여덟살 정치순과 성혼, 이렇게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순은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에도 1904년생 딸 하나 이외에는 깊은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원사에서의 수도 수행 및 공부할때에 정치순으로 하여금 의복을 올리라 했을 때 정치순의 불만을 미리 아시고 깨닫게 하니 그 후로는 불평없이 아내의 도리를 잘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당시의 전봉준(전명숙)이 일찍부터 그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1894년에 찾아와 거사를 하는데 도움을 청하였으나 강증산(강일순)은 단호하게 “아직은 때가 아니니 나서지 말라 하는 것이 내 뜻이자 당부요.”라며 “성사도 안 되고 오히려 애꿎고도 애매한 백성만 많이 죽을 것이라 사료되오.”라고 자신의 동학 거사 협조 거부 취지를 분명히 피력하였다고 한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유랑하며 관군에 쫓기던 동학군 몇 명을 구하기도 하고, 동학군에 가담한 사람에게 이제는 차라리 동학군에 들지 말라고 하면서 각자각자의 향리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스물일곱 살 되는 1897년에 다시 전국 유랑을 시작하여 3년간의 유랑을 끝낸 1900년전라북도 고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강증산(강일순)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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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강일순)이 천지공사를 봄으로부터 김형렬(金亨烈)의 집, 이른바 전라북도 김제 구릿골에 주요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강증산의 조화권능을 체험했다고 전한다. 구천상제 강증산 선생의 주요 제자로는 수석제자인 미륵불교 성도 김형렬(金亨烈)[8] 선생을 위시하여, 일제강점기 시대 최대의 교단으로 조선총독부 기록 관련상 650만의 신도를 거느린 차경석보천교와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이치복, 백복남, 김호연, 신경원, 신경수, 이도삼, 안필성, 백남신, 신원일, 김광찬 등이 있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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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병으로 인하여 향년 39세로 사망했다. 그가 병으로 숨지던 당시, 그의 세번째 부인 고판례 여사는 30세였으며, 아버지(강문회)는 64세요, 어머니(안동 권씨 권양덕)는 60세였고, 과부 빙모(밀양 박씨 부인)는 53세였었다.

가족 및 친인척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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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은, 1891년 6월, 첫 결혼한지도 13년여만인, 1904년 4월에 초배 정치순(1874년생 첫째 부인, 하동 정씨.)과 이혼을 하고, 이어 같은해(1904년) 9월에 계배 김말순(1890년생 둘째 부인, 김제 김씨.)과 재혼(두번째 결혼)하였으나, 3년 남짓 지난 1907년 6월에 두번째 이혼하였으며, 같은 해 1907년 12월 8일에 삼취 고판례(1880년생 셋째 부인, 일명 고수부, 장흥 고씨.)와 삼혼(세번째 결혼)하지만, 그로부터 어언 약 두해 남짓여가 지난 1909년 음력 6월 24일(양력 1909년 8월 9일)에 병으로 인하여 향년 39세로 사망했다.
  • 증조부모
  • 증조부: 강보랑(姜甫浪) - 적향 진주 강씨 후손.
  • 증조모: 무안 박씨 부인(務安 朴氏 夫人)
    • 양조부모
    • 양조부: 강두중(姜斗重) - (강일순의 아버지 강문회 선생의 백부(큰아버지)이자 양부.) - 원래 큰할아버지.
    • 양조모: 평택 임씨 부인(平澤 林氏 夫人) - 원래 큰할머니.
    • 친조부모
    • 친조부: 강한중(姜漢重) - (강일순의 아버지 강문회 선생의 생부. 친손 증산 강일순한테 법적으로 종조부(작은할아버지)가 됨.)
    • 친조모: 전주 박씨 부인(全州 朴氏 夫人, 강일순의 아버지 강문회 선생의 생모. 친손 증산 강일순한테 법적으로 종조모(작은할머니)가 됨.)
      • 부모
      • 아버지: 강문회(1846년생~1912년졸) - 친조부(강한중)의 2남 1녀(3남매) 중 장남이자 둘째로, 1855년 이후 큰할아버지(강두중)의 양자.
      • 어머니: 권양덕(1850년생~1914년졸) - 안동 권씨 부인.
        • 본인: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년생~1909년졸)
        • 초배 배우자: 정치순(鄭治順, 1874년생~1928년졸) - 하동 정씨 부인. - (1891년 6월, 결혼.~1904년 4월, 이혼.) -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과 사이에 2남 3녀(5남매, 그 가운데 막내딸 강순임)를 둠. - 막내딸(강순임)을 제외한 자녀(2남 2녀)는 어렸을 때에 모두 병으로 죽음.
          • 자녀: 2남 3녀
          • 막내딸: 강순임(姜舜任, 아명(兒名): 강이순(姜二順), 1904년생~1959년졸) - 초배 정치순 여사의 소생.
      • 초배 정치순의 친정 아버지: 정치환(鄭致煥)
        • 초배 정치순의 친정 남동생: 정남기(鄭南基) - 정치환(鄭致煥)의 아들.
        • 계배 배우자: 김말순(金末順, 1890년생~1911년졸) - 김제 김씨 부인. - (1904년 9월, 결혼은 증산 강일순의 재혼.~1907년 6월, 이혼은 증산 강일순의 두번째 이혼.) -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과 사이에 자녀 없었음. - 친정아버지 김형렬(金亨烈) 내외의 3녀 중 막내(셋째딸)로 출생하여, 1904년 9월, 증산 강일순과 결혼하였으나, 결국 1907년 6월,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과 이혼 이후, 1909년 11월, 어느 장흥 오씨(長興 吳氏) 부농 집안의 첫 상배한 후손의 계배 부인으로 재가하지만 1911년 갑자기 병으로 인하여 22세로 병사.
      • 계배 김말순의 친정 아버지: 김형렬(金亨烈, 1862년생~1932년졸) - 그의 3녀 중 막내딸(셋째)이 바로 김말순 여사.
        • 삼취 배우자: 고판례(高判禮, 도명: 고수부(高首婦), 1880년생~1935년졸) - 장흥 고씨 부인(고덕삼(高德三)의 외동딸.). - (1907년 12월 8일 (1907-12-08), 결혼은 증산 강일순의 삼혼.~1909년 8월 9일(1909-08-09), 증산 강일순 병사.) - 1883년에 아버지 고덕삼(高德三)을 병으로 여의고, 1888년에 어머니(밀양 박씨)와 함께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원래 1893년 10월에 아주 신씨(鵝洲 申氏) 집안의 부농가 후손에게 (妾)으로 첫 출가한 훗날, 1907년 7월, 첫 남편(아주 신씨 후손)과는 자녀도 없이 사별 후 1907년 12월 8일 (1907-12-08), 강일순과 정식 재혼하지만,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과 사이에서도 자녀는 없었음.
        •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남
        • 남동생: 강재득(姜在得, 1874년생~1879년졸) ... 6세 시절에 홍역으로 병몰.
        • 여동생: 강선돌(姜仙乭, 1878년생~1944년졸) ... 일명 선돌부인.
      • 삼취 부인 처갓댁
      • 삼취 장인: 고덕삼(高德三, 1853년생~1883년졸) - 불목하니 출신인데, 1883년 당시에 병으로 하세.
      • 삼취 빙모: 밀양 박씨 부인(密陽 朴氏 夫人, 1857년생~1927년졸)
      • 삼취 처이모부: 차치구(본명: 차중필, 1851년생~1894년졸) - 계배 고판례 여사의 친정 이모부. - 적향 연안 차씨 후손.
        • 삼취 이종처남: 차경석(본명: 차윤홍, 1880년생~1936년졸) - 연안 차씨 후손이자, 차치구(본명: 차중필)의 4남 중 3남(셋째 아들). - 결국 차경석은 강증산(강일순)의 삼취 고판례 여사의 친정 외갓댁 동갑내기 이종사촌 남동생(외척 이종제, 外戚 姨從弟)이고, 차일혁(참전 용사 출신)의 아버지이며, 차길진(작가 겸 야구 구단주 직무대행 출신의 연구소 관련 기업인)의 친조부.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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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의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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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강증산을 직접 수종들었던 원석급의 제자들이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교, 제화교, 태을교, 고부파, 도리원파, 김병선교단으로 9개 교파로 갈라졌다. 보천교에서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 조달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민족종교 탄압정책으로 인해 강증산의 교단과 제자들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5년 고수부가 선화한 후 1936년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이어서 사망하였다. 차경석교주가 사망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보천교를 탄압하여 십일전 건물을 해체하여 일부는 지금의 조계사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일부는 전주역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 그후 남은 잔해는 방치되었다. 보천교 십일전 건물의 터를 비롯한 강증산의 교단 유적들은 전라북도 정읍의 향토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강증산과 고수부의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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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은 고수부에게 종통대권을 넘겨주는 공사를 보았다고 한다. 고수부는 1911년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이후 도통을 하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어천이후 흩어졌던 강증산의 제자들이 고수부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최초의 교단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후 고수부와 강증산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이 만든 교단은 1920년대까지 급격히 성장하였고 이후 이 교단에서 차경석과 다른 일본의 탄압으로 인해 명맥이 끊어지고 제자들이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45년 일본 패망이후 강증산을 옥황상제이자 미륵불로 믿는 신도들 일부가 모여 다시 교단이 보천교 부흥운동이 형성되었으나 약 1만명이 모이는 것으로 그쳤고 다시 교단이 형성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1945년 안운산 태상종도사는 강제해산된 보천교에서 60방주중 중심 인물을 역임한 몇명과 같이 강증산과 고수부를 믿는 대법사 증산교를 설립하였다. 대법사 증산교에서는 강증산을 미륵불이자 옥황상제로 고수부를 강증산과 같이 이 땅에 도솔천에서 강세한 성인이자 최초의 여성 부처님으로 믿고 있다. 강증산의 친족들중 진주 강씨 문중의 상당수의 사람들도 교단이 형성되자 강증산과 동일한 기행이적을 행하는 고수부의 교단에 모였다고 한다.

강증산의 친인척이 세운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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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의 관련 인물들 중, 이혼한 이전 초배 정씨부인(이전 첫 부인 정치순 여사), 여동생인 선돌부인(강선돌), 딸인 강이순(본명 강순임)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이다. 강증산은 당시 1907년, 동아일보 신문에도 게재 및 제론된 바 있어 당시 대한제국(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강증산의 성령을 받은 고수부와 제자들이 교단을 형성되자, 이에 자극받아 강증산의 직전 제자는 아니었으나, 강증산의 가르침을 받드는 교단이 형성되었다. 정통성으로는 강증산의 사별한 첫째부인인 정씨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여동생인 선돌부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 딸인 강이순(강순임)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단들이다. 대표적으로 순천교, 무극도, 태극도, 삼덕교, 보화교, 용화사, 미륵불교, 증산법종교, 청도대향원, 미륵종, 증산진법회가 있다. 현재 가장 큰 교단은 무극도에서 나온 대순진리회가 대표적 교단이다.

강증산에 대한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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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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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경전들이다. 식민지 지배 하에 민족 종교 탄압 정책으로 인하여, 언론과 종교활동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경전 간행이 비교적 자유롭지가 못했다고 한다. 성격상 한민족이 인류를 구원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동시에 민족 종교는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의 군자금의 조달처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민족종교 탄압과 집회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발간된 최초의 경전이 증산천사공사이이다. 1922년 수석성도인 김형렬(증산 강일순 교조의 두번째 전처 김말순 여사의 친정아버지.)의 증언을 받아서 미륵불교에서는 최초의 경전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륵불교의 경전으로 간행되기 전에 김형렬의 증언을 받아 자료를 수집한 이상호가 미륵불교를 탈교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상호는 증산천사공사기를 개인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상호는 이후 《대순전경》을 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동화교를 창립한 후 보천교 차경석 교주에게 있던 고수부(고판례)를 동화교로 모셔오게 된다.

대부분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나 을유 광복(8·15 해방)의 이후 간행된 서적들이다. 경전 간행이 자유롭지 못한 수수가지 부분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정작 교단이 해체된 상태여서 강증산(강일순)의 직전제자들이 만든 교단들을 중심으로 강증산(강일순)의 행적이 전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 교단이 서로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내용들이 타 교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었었다고 한다.

통합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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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강일순)의 제자들이 거의 대부분 사망한 이후인 1970년대에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대조하기 시작한 경전이다. 1970년대 이전에 간행된 초기경전들은 같은 구절에 대해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시기와 참여자에 대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특정인 한명의 시각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빠진 내용이 많고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불가능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증언자끼리 수차례에 걸친 교차검증과 현장 답사를 거친 경전간행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합경전은 강증산의 제자들 중 강증산을 가장 오랫동안 따라다녔던 김호연의 증언이 수집되어 추가되었다. 오히려 초기경전 전체를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내용이라고 한다. 강증산의 수석제자인 김형렬(강증산 대도주의 두번째 이혼한 두번째 전처 김말순 여사의 친정아버지.)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내용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수부(강증산 대도주의 마지막 결혼한 세번째 부인 고판례 여사)에 대한 경전은 고수부 여사의 직전제자인 고찬홍 등과 고민환 등에 의해 자필로 제작되어 영인된 일부 경전이 있었으나 역시 답사를 거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증산도의 안경전종도사가 통합경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0년 동안 현장답사와 확인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강증산을 직접 따르던 제자중 마지막 제자에 속하는 김호연을 만나 9년동안의 전반적인 천지공사과정을 증언을 받아 현재의 증산도 도전 개정판에 추가하였다고 한다.

각 교단에서 초기경전을 사용하는 곳은 있으나, 통합적인 답사와 확인작업을 거친 경전은 최초로 발간된 경전이자 총집대성본(總集大成本)인 《증산도 도전》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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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증산도 도전》, 2003년.
  • 전경
  • 선도진경
  • 이상호, 《대순전경》, 1997년.
  • 보천교 연혁사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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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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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는 증산도·증산법종교 등에서 부르는 칭호.
  2. 이는 대순진리회·태극도 등에서 부르는 칭호.
  3. 하동 정치순 여사와 첫번째 이혼 이후, 김제 김말순 여사와 재혼하였으나 두번째 이혼하고 나서, 장흥 고판례 여사와 마지막 3혼.
  4. 음력 9월 19일
  5. 음력 6월 24일
  6. 증산도·증산법종교 등에서 부르는 칭호.
  7. 대순진리회·태극도 등에서 부르는 칭호.
  8. 한때 강증산(강일순)은 수석제자 김형렬(金亨烈) 내외의 3녀 중 막내딸(김말순)과 1904년 9월, 재혼했다가 1907년 6월, 두번째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