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양경종
Please take a look: 위키백과토론:대사관#양경종 (Yang Kyoungjong)--95.25.246.71 (토론) 2012년 10월 31일 (수) 01:09 (KST)답변
[1] 판에 있던 내용을 옮깁니다. 실존 여부에 대해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해 보입니다. -- ChongDae (토론) 2012년 11월 20일 (화) 10:24 (KST)답변
하지만 '양경종'이라는 인물과 그의 생애는 출처가 불분명한 이야기가 사실처럼 과장된 일종의 도시전설(urban legend)이다.
출현 배경
편집노르망디 전선에서의 한국인 포로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저명한 군사사 저술가인 스티븐 앰브로즈(Stephen Ambrose)의 저작 《D-Day》(1994년)이다. 여기에는 당시 미 육군 제506 낙하산 보병연대 E중대[1] 소속이었던 로버트 브루어(Robert B. Brewer, Sr.) 중위[2] 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있다:
침공 당일 유타 해안에서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 제506 낙하산 보병연대의 로버트 브루어 중위는 독일 국방군 군복을 입은 4명의 아시아인을 생포하였다. 아무도 그들의 언어를 몰랐다. 그러다가 그들이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어떻게 한국인들이 미국에 맞서 히틀러를 위해 프랑스를 방어하는데 싸우게 된 것일까? 그들은 아마 1938년에 일본군에 징집되었고 —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 이후 1939년에 붉은군대가 일본과 국경분쟁을 하는 와중에 포로가 되어 붉은군대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1941년 12월에 모스크바 외곽에서 독일 국방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군에 강제 편입되어 프랑스로 보내진 것 같다. (이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브루어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한국으로 송환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거의 분명히 남한군이건 북한군이건 어느 쪽엔가 징집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1950년에 다시 한번 참전하여 한국 어느 편에 있었느냐에 따라 미군에 맞서 싸웠거나 미군과 함께 싸웠을 것이다. 이런게 20세기 역사에서 정치의 변덕이다.)[3]
한국에는 2000년 무렵 이 내용이 국내 2차 세계대전사 관련 포럼에서 동호인들을 통해 소개되면서 서서히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에 해당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4] 그러나 당시 국내 2차 세계대전사 동호인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련 정보를 수소문하였음에도 이 한국인에 대한 추가 자료는 확보되지 않았다.
이 주제가 다시 부각된 것은 인터넷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시아계 포로들에 대한 사진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1944년 당시 독일군은 노르망디 해안을 비롯, 이른바 '대서양 방벽(Atlantikwall)'을 수비할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다수의 '동방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부대들은 독소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소련군 포로 가운데, 소련에 대한 충성심이 약한 아시아계 병사들을 따로 추려내어 전투보조원 등으로 운용한 것이다. 대다수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투르케스탄, 타타르 등의 중앙아시아계 민족들이었다.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포로 사진을 보면 이들로 추정되는 아시아계 병사들이 다수 확인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외모를 지닌 포로들 사진이 발견되면서 앰브로즈가 언급한 '노르망디의 코리안'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양경종 설의 제기
편집이런 가운데 '양경종'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도깨비뉴스의 기사 댓글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도깨비뉴스는 《이 한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라는 제목의 기사[5]에서 당시 논란이 되던 한국인 추정 포로 사진 가운데 한 장을 소개하였다. 이후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truth'라는 익명의 독자가 사진의 주인공이 '양경종'이라고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게시했다.
이름 : 양 경종
생년월일 : 1920년 3월 3일
본적 : 신의주
관동군 입대 : 1938년
노몬한 전투 참전때 소련군 포로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해변에서 미군 포로
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1947년 미국으로 이주
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학 부근 거주하다 사망
평범하게 태어나 수많은 전쟁참화를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
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시민으로 생활
슬하에 2남 1녀 자녀 둠.
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경험을 이야기 한적 없다고 전해짐.
해당 기사의 기자는 사실 확인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락해달라고 댓글을 통해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익명의 독자('truth')는 끝내 더 이상의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양경종 설의 문제점
편집양경종 설은 이후 인터넷 상에서 무분별하게 과장되어 마치 명확한 사실인 것처럼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순한 익명의 댓글 하나일 뿐이다. 다른 객관적인 사료나 증언으로 전혀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우선 로버트 브루어의 진술 내용과 앰브로즈의 인용문에 담긴 사실부터 매우 빈약하다. 노르망디 일대에서 잡힌 포로 관련 기록 가운데, 국적을 '한국인(Korean)'으로 적시한 자료 자체가 브루어의 인터뷰 기록 이외에 전무하다. 관련된 아시아계 포로 사진 가운데에도 명확히 '한국인'으로 적시된 사진은 없다. 설령 한국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식민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 치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기재되었거나 동북아시아 계통을 뭉뚱그려 '중국인'으로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그들 한국인 포로들의 행적이 정말 식민조선에서 일본군 징집 → 노몬한 전투 포로 → 소련군 강제 편입 → 모스크바 전투 포로 → 독일군 강제 편입 → 노르망디 상륙작전 포로의 과정이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원문에서 'It seems ~ (~인 것 같다)'로 표현되어있듯이 이 파란만장한 이력은 브루어의 추측일 따름이다. 오히려 만약 포로들이 자신을 '코리안'이라고 밝혔다면 이는 소련 내에 거주하던 한국계 주민, 즉 '고려인'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들 4명의 한국계 포로들은 고려인 출신 소련군으로 복무하다 포로가 되어 동방부대로 흘러들어간 경우일 가능성도 높다. 이럴 경우 위의 '양경종'의 이력과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독 로버트 브루어가 '한국인(Korean)' 포로의 존재를 특정하여 상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의 행적과 연관이 깊다. 그는 1944년 9월 마켓가든 작전 초기에 에인트호번에서 중상을 입고 귀향하여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Berkeley)에 등록하였으나, 곧이어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채용되었다.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중앙정보국 요원으로 미군 군정 하에 있던 일본에 배치되어 극동 지역 정보수집 및 분석 업무를 수행했으며, 이후에도 1973년에 대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중앙정보국 소속으로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아시아 관계 정보활동을 상당 기간 맡아 왔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미국인과 달리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이해를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어가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참전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급장교였기 때문에 문제의 한국인 포로의 행적에 대해 정확한 심문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퇴역 후에 이루어진 앰브로즈와의 인터뷰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무렵의 단편적인 심문 기억에, 전후에 쌓은 동아시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덧붙여서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2005년에 제작, 방송된 SBS 스페셜 노르망디의 코리안에서는 노몬한 전투 당시 조선인 포로 기록, 독소전쟁에 참전한 고려인 기록, 독일군의 동방부대 관련 기록 등을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그러한 인물에 대한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고 전했다. 특히 소련군으로 복무하다 포로가 된 이후 독일군 동방부대에 편입된 병사들은 소련측이 중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영국-소련 사이의 비밀 협약에 의해 이들은 전후 소련으로 철저히 강제송환되어 비참한 수용소 생활을 겪어야 했다. SBS 제작진은 미지의 '노르망디의 코리안'이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와, 그가 '양경종'이란 이름으로 노스웨스턴 대학 주변에서 은거하다 사망했다는 내용은 허구라는 입장을 표명했다.[6]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보면 로버트 브루어의 인터뷰에 나온 4명의 '한국인(Korean)' 포로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양경종'은 익명의 누리꾼에 의해 창작된 가공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 ↑ 이 부대가 바로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해진 이른바 '이지중대(Easy Company)'이다.
- ↑ 브루어 중위는 '이지중대'의 일원이었지만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미니시리즈의 원작인 스티븐 앰브로즈의 동명 논픽션에서도 에인트호번 전투에서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비롯해 군데군데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 ↑ Ambrose, Stephen. 《D-Day June 6, 1944: The Climactic Battle of WWII》. Simon & Schuster. ISBN 978-0671673345.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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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id=
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박용배. “한반도는 이산의 오작교가 아니다”. 주간한국.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작성일자=
(도움말) - ↑ 오나라. “이 한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 도깨비뉴스.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작성일자=
(도움말) - ↑ 신언훈(연출), 신진주(글/구성) 등. “노르망디의 코리안 (제1부) 독일군복을 입은 조선인, (제2부) 국적 없는 포로”.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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