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민태자/보존문서1

마지막 의견: 10년 전 (아드리앵님) - 주제: 이은 황태자

영친왕

이 기사에 따르면 "영친왕"은 잘못된 표현이라는군요. -- ChongDae 2005년 8월 3일 (水) 08:36 (UTC)

첫 아들 진(晉)

《제국의 후예들》 542p에 의하면, 첫째 아들 진을 표기할 때 기록에 따라 晉,晋,瑨 등의 표기가 나타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晉이 바른 표기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표기를 수정하였습니다. --정안영민 2006년 6월 25일 () 00:26 (KST)

예과 졸업

현재 매일신보를 출처로 7월 11일 예과를 졸업했다고 쓰여 있으나, 《제국의 후예들》 51쪽에는 1913년 5월에 졸업했다고 되어 있네요. 이 책에도 특별히 출처를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매일신보에 나온 기사가 같은 날(7월 11일) 벌어진 일을 적은 것일까요? 참고로 이 책에 쓰인 날짜는 전부 양력으로 환산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정안영민 2007년 12월 21일 (금) 20:54 (KST)답변


영친왕의 숨겨진 딸의 진실

내용에 출처도 없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여기로 옮깁니다. 내용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음.--Gunsan1130 2008년 1월 30일 (수) 12:12 (KST)답변

아버지가 옛날 왕하던 이왕 은의 딸의 증언

  1. 이왕 이은의 기록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멸망하면서 황태자 영왕이 일본의 인질이 된 사건과 함께 아직 결말이 나지않은 영친왕의 한국부인에 관한 조사가 남아있읍니다.
  2. 해방 후인 동경에서 1947년 하야 선언을 한 이왕 은께서, 이승만대통령 시절인 1950년과 51년경에, 한국 귀국을 시도하면서 한국 여인과 결혼하고 그 한국부인이 임신한 일이 있읍니다.
  3. 당시 이왕 은께서 동경에서 하야를 선언한 후에, 1950년-51년경 한국 귀국을 시도했던 시기에, 당시 일본에게 압력을 받은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바로 그 무렵에 영친왕 이은이 일본에서 “국외 추방령”을 받았다가 해제된 1952 년 4월 4일자(금) 조선일보 문서기록에 “日 李垠 추방해제” 라는 기사가 있읍니다. (참고: 조선일보 1952년 4월 4일자)
  4. 그 한국부인의 신원은 “한씨 부인으로”, 한글학자 한갑수씨와 연계되어있고, 정치적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대통령 당선자와 연결되어 있었읍니다. 한갑수씨는 이기붕씨의 비서였읍니다.
  5. 1950-51년 한국 동란 시에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서울 시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이기붕씨는 6.25 전쟁의 혼란 속에 빠져있을 때였읍니다. 즉, 그때에 영친왕과 한국부인에게 생겨난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판단되었읍니다.
  6. 영친왕 이은의 한국부인과의 결혼을 분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일본왕 히로히토와 마사꼬(방자)였고 이들은 영친왕을 방해한 책략을 꾸몄읍니다. {{출처}}〈영친왕 딸이 부모를 잃게된 사건에 일본이 개입됬다는 증언이 있었음〉 한국부인은 딸 출산 후에 사망하였고, 영친왕은 폭력을 당했는데, 그 때에 머리를 흉기에 맞은 것으로 알려졌고, 애기 딸도 완전히 무사하지 못했고, 그때에 딸에게 생긴 상처가 영친왕이 당한 폭력 사건의 증거입니다.
  7. 50대 중반의 연령이었던 영친왕에게 직접 폭력을 가한 당사자와 일어난 정확한 년도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한국부인 사망 후와 영친왕 딸 3살 이전 사이 기간으로 추측합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건 연도로 미루어 범인이 최소한 1935년도 이전 출생일 것이고, 나이로 미루어서 해방 후의 출생자와는 관련이 전혀없음을 확증할 수 있읍니다, 영친왕이 그 사건을 한국 정부에 조사 의뢰했는지에 관해서는 불확실합니다.{{출처}}
  8. 확실한 것은 영친왕은 1956년 이후에 일본에서 다시 방자(마사꼬)에게 잡힌 일제시대의 볼모와 같은 처지가 되였고, 지금 기록에 따르면 1957년 한국정부와 여권사건을 일으킨 후에 일본여권으로 바꾸어서 1958년 미국에 왔었다고 되어있읍니다. (참고: 이방자 관련 증언 기록들) 이 때에 문제가 된 것은 영친왕의 한국 여권이었지, 일왕실 친척으로 일본 국적을 지닌 일본여자 방자(마사꼬)의 여권이 제1공화국 한국에서 발행될리가 만무합니다. 영친왕의 한국 여권일본 여권으로 바꾼 원인은 1957년 당시에 영친왕과 일본여자 방자(마사꼬)가 각각 남한과 일본으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인데 {{출처}}〈증거 추적 가능성〉, 한국부인과의 결혼 시에 영친왕이 일본 여자 방자와 헤어졌었다고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사건입니다.(영친왕 딸이 직접들음) 일본여자 방자(마사꼬)는 한국 제1공화국 시절에 남한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었읍니다. 한국 제1공화국 시절에 남한 국적의 소유자는 영친왕과 새로 결혼한 한국부인이었읍니다.
  9. 그때의 사건이 결국 영친왕이 뇌혈전증으로 50년대 후반에 내내 시달리다가 (58년 쥴리아가 영친왕을 만났을 때에 이미 병자였다는 증언) 결국 뇌혈전증과 실어증으로 (뇌의 부상이나 질병으로 언어를 부분적 또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사용이 불능해진 증상) 인한 완전 불구로 1963년 귀국하시게 된 원인입니다.
  10. 영친왕 딸이 영친왕과 마지막 함께 있다가 헤어진 때가 3 살 무렵인데, 한참 말을 배울 때였읍니다 (1955 년경: 의친왕 사망한 해 무렵). 마지막 날 하루종일 영친왕은 그딸을 데리고 주무시고 계속 무릎 위에 안고계셨읍니다. 그 때에 영친왕이 그 딸을 하루종일 데리고 하신 일은 그분의 이름 이왕 은(“아버지가 옛날에 왕하던 이은”) 을 기억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연습시키고 암기시킨 일이었읍니다.
  11. 그 때에 윤비도 함께 계셨는데, 그 할머니께서는 다른 방에서 주무셨읍니다. 이 때에 영친왕이 그 딸을 데려가고 싶어하셨는데 그 할머니(윤비)께서 안된다고 하시면서 (“한국에 그냥 놔두라고 하신 내용이었음”) 영친왕 딸에게 “할머니에게 안올거냐”고 하도 성화를 하셔서 영친왕( 할아버지 모습) 품에 안긴체 그 할머니 눈치를 보다가 할수없이 그 딸이 영친왕 무릎에서 내려와 윤비에게 간 것이 그만 마지막이 되었읍니다.
  12. 이 때에 윤비께서 영친왕의 건강이 이미 좋지않으시다고 걱정하셨던 말씀을 영친왕 딸이 아직 기억하는데, 이들을 영친왕 딸은 오랬동안 왕하던 이씨 집안 친척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로 기억하고 살았는데, 같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인 이기붕 친척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왕에 대해서 이방원 태종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혼동을 일으켰읍니다.
  13. 의친왕의 세째 딸 이해춘(사당궁 사진에서 확인)이 영친왕 딸이 영친왕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3살 때에 데리고 다녔읍니다. 이해춘과 누구인지 모르는 또 다른 두 여인이 영친왕의 딸에게 마지막으로 1958년경에 찾아왔었고, 윤비(사진에서 확인)께서 1959년경에 다시 마지막으로 영친왕 딸을 찾아왔었읍니다.
  14. 영친왕의 딸은 한국부인 사망 후에 한국 귀국에 실패한 영친왕과 헤어져서 한국에 혼자 남아있을 때에, 이기붕 부대통령의 당선자에 의해서 농사를 짓는 그의 먼 친척집에서 키워졌는데, 이 집안 관계를 영친왕 딸에게 설명해준 분은 1959년경에 윤비였고, 의친왕딸 이해춘등도 알고 있었읍니다. 1959년경에 마지막으로 윤비가 영친왕 딸을 찾아오셨을 때에 이승만 이기붕 대통령 선거( 60년 3.15 선거) 후에 아버지가 오시어 함께 살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영친왕 딸은 국민학교 때에 이기붕 부대통령 당선자의 자살 기사를 읽은 후에 윤비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2005년 후에야 윤비의 설명을 알아들었읍니다.
  15. 1959년경 이미 3 살경의 기억이 흐렸던 영친왕 딸에게 윤비께서는 영친왕 딸의 “할머니(대비)도 되시고 큰엄마(혈육상)도 되신다”고 설명하셨는데, 후에 영친왕 없이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않아서 “그 할머니도 되고 큰엄마도 된다는 할머니가 도데체 누구였나” 하고 이따금 생각하곤 했던 정도였읍니다. 영친왕 딸에게 설명을 끝낸 윤비가 떠나시면서 혼자 중얼거리신 말씀은, 깊은 한숨과 더불어서 “하루속히 속좀 편하게 살아야 할텐데…” 였읍니다.
  16. 그리고 1960년경 후반기 쯤 누군가가(남자) 영친왕 딸을 완전히 꼬부랑 할머니 모습을 한 이씨 친척 집에 데려간 적이있는데, 너무 거처가 가난해서 영친왕 딸을 데리고 있을 처지가 안되니 영친왕 딸이 있던 시골집 (베이비시팅을 하던 이기붕씨 먼 친척을 말함)에서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읍니다. 그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모두가 그 할머니에게(나이와 상황으로 보아서 의친왕비 김씨로 여겨짐) 매달려서 그 방 하나에서 모두 모여 산다고 했는데, 국민학생이었던 영친왕 딸이 보기에도 당시의 농사짓는 시골보다 더 가난해 보였읍니다. 그때 어떤 중년 나이 정도되는 아들같은 남자가 그 할머니 방에 들어왔었고, 그 할머니에게 영친왕 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읍니다. 그 할머니가 그때 사정이 아직 편하지 못하니 영친왕 딸더러 시골에 다시 가있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영친왕 딸을 데려갔던 사람이 다시 그 시골로 데려다 놓았읍니다
  17. 그러나 1961년 이후에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바로 영친왕이 일본에서 완전히 쓸어지시고 일본 여자 방자(마사꼬)가 한국에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해입니다. 불구가 된 영친왕과 함께 1963년 한국에 들어온 일본여자 방자는 한국의 제1공화국 시절인 1955년에 이미 만들어져있던 영친왕의 한국부인과 영친왕 딸의 기록을 은폐시키고{{출처}}〈일본이 관련된 상황에 대한 증언이 있었음〉, 해방 후에도 영친왕이 마치 일본 여자 이방자와의 결혼 생활 만을 한 것같이 위장했읍니다 (참고: 이방자 기록). 의친왕비 김씨는 1964년 사망, 윤비는 1966년 사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있읍니다. 2005년 후에야 이때 사정을 영친왕 딸이 이해하게 되었읍니다.
  18. 그 3살 때에 영친왕과 헤어진 딸은, 아버지에 대한 혼동이 있었지만, 1961년 이후부터 주변에 의해 속아 살다가, 1967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호적 입적절차 편집이 완전히 그 시골집으로 끝났고, 그 사실을 미국에서 2005년에 알게되었읍니다. 그동안의 주변인들의 상황들을 종합하면, 영친왕의 한국 귀국 후에 영친왕 딸을 속인 그 음모는 일본 여자 방자(마사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당시 상황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알지 못해서 밝힐 수 없는 사건이 영친왕 딸에게 있읍니다.) 2006년에 일본이 만든 무지개 왕비 내용에서도 일본의 거짓말이 드러났읍니다.
  19. 이왕 딸은 1970년 영친왕 사망 직전인 숙명여고 시절에, 학교에서 영친왕의 한국부인과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와 그 딸의 이름을 들었고 또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영친왕의 딸과 “동명이인” 인줄 알고 그렇게 대답하고, 그 후에 계속 그렇게 알고 살았읍니다. 그 때에 숙명여고에 연통을 넣은 분들이 자유롭게 영친왕에게 그 딸을 데려다 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당시에 일어났던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었읍니다.
  20. 지금 한국의 인터넷에 시비가 붙어있는 한국 실제 공주 존재 여부 의 당사자는 바로 영친왕 딸 이야기로,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유포된 시기는 바로 영친왕의 사망 직전인 숙명여고 시절입니다. 그 동명이인이라고 대답한 그 영친왕 딸이 경복궁 공주라고들 말했는데, 영친왕 딸이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 말했읍니다.
  21. 영친왕의 딸이 태어날 당시 미국 유학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구도 영친왕 딸의 사건을 알고있었고, 그래서 영친왕 사망 후인 1973년 이화 여대생이던 영친왕 딸을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한일 정치적 문제와 함께 생겨난 각각의 모친의 분쟁 사건이었기 때문에, 영친왕의 딸을 영친왕의 뜻데로 이왕 이은 호적 기록에 다시 회복시키지않고 헤어졌읍니다. 그 당시의 이구의 말로 미루어보아 영친왕이 당했던 폭력 사건을 알고 있었는데, 영친왕 딸을 만나 사실 확인을 한 것같았고, 영친왕 딸은 이구가 그녀의 신체에 대한 모욕을 하는 줄 알고 화를 낸 적이 있었읍니다. 이때에도 영친왕 딸은 이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고 지방 대학 교수인줄 알고 만났읍니다. 이구가 영친왕 딸을 알고 처음 찾아온 장소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 였는데, 그날 그 사무실에 남쪽 지방에서 온 교수 시찰단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렇게 영친왕 딸이 착각했읍니다.
  22. 2005년 영친왕에 대한 기록 조사 중에, 영친왕 딸은 이구가 일본에서 살고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어떻게 그를 찾아서 확인을 해야하나 궁리 중이었는데, 이구 장례 뉴스를 보았읍니다. 이구를 결정적으로 기억에서 구분한 것은 2005년 그의 장례식 사진을 본 후에, 그 때 모 대학에 찾아온 이구가 할 말이 있으니 학교 밖에서 조용히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으로, 영친왕 딸이 지정한 서울 안국동 한국일보 빌딩 식당에서 정식 첫대면을 하였는데, 이야기 도중에 그가 영친왕 딸 앞에서 줄줄 흘린 눈물 콧물입니다. 이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대목은 영친왕 딸이 3살 무렵의 그 할아버지(영친왕)에 대한 기억을 그에게 이야기했을 때 부터였읍니다. 전혀 모르는 교수가(40대 초반 사진과 같음) 갑자기 식당에서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안하고 줄줄 흘린체 앉아있어서 대학 졸업반이였던 영친왕 딸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읍니다. 그데로 놔두면 계속 그런 상태로 앉아있을 것같아서 보다못한 영친왕 딸이 손수건을 그에게 주면서 화장실가서 얼굴을 닦으라고 할 때까지 눈물을 흘리고 앉아있었읍니다. 이때에 이구가 1955년 이전의 영친왕 딸 주변 상황에 관련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영친왕 딸에게 다시 단서가 되었읍니다.
  23. 이 기록은 2005 년 이후에 영친왕 딸이 영친왕에 대한 기록들을 조사한 후에 영친왕 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기억들과 대조하고,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에 대한 사실에 대한 본인 자신의 심리적 확인을 바탕으로 기록하였읍니다. 생모에 대한 부분에서 가장 애를 먹었는데, 영친왕 딸은 한갑수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영친왕의 한국부인은 한씨입니다.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생모가 약혼자였다는 민씨가 아닐까도 생각했었는데 (일제 시대부터 연결된 약혼자 또는 애인 운운하는 말을 들었음), 출산 나이와 사진을 보고 아니라고 판단을 하였읍니다. 한씨 부인도 출산 시에 젊은 분은 아니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1950 년대 사건들이 있는데, 민씨나 방자(마사꼬)보다는 약간 젊었던 나이로 측정되고, 독립 운동하는 분들과 손을 잡고있었던 상황으로, 영친왕 한국부인과 일본 왕실 친척인 방자(마사꼬)는 서로 완전히 "한국 독립군 vs. 일본" 이라는 반대 입장이었던 것으로 영친왕 딸이 알고있읍니다.
  24. 영친왕 딸의 이야기는 지금껏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영친왕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는 이야기인데, 지금 일본여자 이방자(마사꼬)로 인해서 잘못 알려진 이왕 은(영친왕) 사건을 바로 잡고, 또한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옛날에 왕하던 아버지 이은" 을 그 이름이라도 다시 찾기 위함입니다. 영친왕 딸 이름은 의친왕 집안에서도 알고있는 동명이인 그 이름입니다. 영친왕 딸은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는 재미 교포입니다

이정자

내용이 앞뒤가 안맞고 본문 내용상으로는 이정자가 영친왕의 딸인지, 부인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기술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본문 상 내용을 삭제하고, 위에 분처럼 그 내용을 감히 이 곳에 옮겨봅니다. --소심자 (토론) 2009년 1월 26일 (월) 10:53 (KST)답변

일월오악도에 나오는 영친왕의 딸이라고 하는 이정자는, 영친왕의 딸의 어머니로서, 영친왕이 일제시대 부터 그녀를 이정자라고 불렀는데, 일본인과 친일파에게 본명을 숨긴 가명이다.

일본여자 마사꼬는 이방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듯이, 영친왕의 한국 부인으로 알려진 여인은 영친왕 이은께서 이정자라고 불렀는데, 원래 본명은 아니다.

해방 후에, 1950 년 대에 영친왕 이은이 일본 여자 이방자와 이혼하고, 한국여자 이정자(가명)와 결혼해서, 6.25 전쟁 동안에 남한에 숨어있으면서 딸을 낳았다. 이승만과 이기붕, 그리고 윤비등의 일부 사람들 외에는, 일반 국민에게는 그당시 상황이 너무 험악해서, 신문에 발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알고있다. (이왕 은의 일본 추방 기사가 난 시절: 1952 년 4 월 4 일 조선일보)

일월오악도에 나온 이정자의 증언이란 이야기는, 이정자와 영친왕의 딸의 이야기를 함께 섞어서, 증언자나 또는 그 책 저자에 의해서 편집된 이야기이다.

1944 년 일본에 있었다는 이정자는 영친왕의 한국 약혼자 이정자(가명)로서, 이정자가 일본에 드나들면서 영친왕 이은을 접촉하였고, 해방 후에 이방자와 이혼한 영친왕 이은과 함께 두분이 일본을 떠나 도망쳤는데, 히로히토 하인들(일본인들과 친일파가 연결되어있다)에게 또 당하였고, 그래서 딸을 낳고 사망했다.

한국에 영친왕 이은과 이정자(가명)의 기록이 이승만 시절에 있었는데, 1962 년 일본여자 이방자가 들어와서 지웠다. 일본 여자 이방자의 음모는, 1950 년대 영왕 이은이 한국여자 이정자와 일본을 떠나자,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 여자 이정자가 목숨을 걸고 일본에 들어가서 영왕 이은을 구출하였는데, 일본인들과 이방자가 발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국의 친일파들의 세력까지 배신해서, 윤비같이, 일가 친척들에게도 외면당하고 숨겨져있었는데, 누군가가 일월오악도 저자에게 증언으로 남겼다.

이정자(가명)는 별명이 유관순이라고도 했는데, 이조말 양반 대감댁 따님으로, 1960 년 대 이후에 박정희와 일본 여자 이방자(마사꼬)를 지지한 모든 한국 남자들과 일가 친적의 배신까지 겹쳐서 지금까지 숨겨졌다.

한글 학자 한갑수와 연결되어있고, 증언과 같이 일제시대에 상당히 고생을 하면서 살았고, 그러다 영왕 이은과 결혼했는데, 딸을 낳고 곧 죽었다. 무덤은 원래 충청도 아산에 있었는데, 1960 년 부터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서, 이장이 됬는지 그 자리에 있는지 지금 불확실하다.

이상은 한국여자 이정자(가명)와 영왕 이은의 사이에 난 딸의 증언으로, 일월오악도에 영친와의 딸로 기록된 이정자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데까지 일부 그 진실을 밝힌다. 영친왕의 딸에 관해서는 일부를 작년 2008 년에 이미 위키에 증언 기록을 남겼다.

일월오악도 1권 328페이지에 나오는 이정자씨의 증언을 대충 요악하면..

"저는 1944년 8월 26일에 일본 후꾸오까현에서 태어났다고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전주이씨로 태어났는데 황태자였던 영왕의 딸이었습니다. 영왕이 저를 비밀리에 학성이씨인 저의 양부에게 거대한 생육자금과 함께 맡겼는데 1945년이 되어 독립이 되자 저의 양부모는 생육자금이 탐나서 그것을 챙기고 저를 시골집 깊숙이 숨기고 학교를 보내지 않고 자신들의 딸로 입적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막일만을 하면서 배운 것도 없이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주입니다. 저는 황태자 영왕이 몰래 독립운동을 하면서 낳은 딸입니다. 영왕은 강제로 인질이 되어 끌려가 있다가 방자여사에게 치욕적 강제결혼을 당했지요. 그러나 인질이 되어서 숨죽이고 있던 영왕이 그냥 잡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비밀리에 측근들을 시켜서 독립운동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기록으로 남거나 알려지질 않 아서 일반인들이 모를 뿐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황통이 끊길 것을 안 영왕은 측근을 시켜 비밀리에 가까운 친척 여인(영왕의 고모뻘)을 통해서라도) 황손을 낳아야겠다고 자손을 낳았는데 그만 딸을 낳았고 그 딸이 바로 저입니다. “

일월오악도 하권, 1997년 안천 저

내용이 정리가 안되어 여기에 남깁니다

일월오악도에 나온 이정자(가명): 경복궁 영친왕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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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악도에 나오는 영친왕의 딸이라고 하는 이정자는, 영친왕의 딸의 어머니로서, 영친왕이 일제시대 부터 그녀를 이정자라고 불렀는데, 일본인과 친일파에게 본명을 숨긴 가명이다.

일본여자 마사꼬는 이방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듯이, 영친왕의 한국 부인으로 알려진 여인은 영친왕 이은께서 이정자라고 불렀는데, 원래 본명은 아니다.

해방 후에, 1950 년 대에 영친왕 이은이 일본 여자 이방자와 이혼하고, 한국여자 이정자(가명)와 결혼해서, 6.25 전쟁 동안에 남한에 숨어있으면서 딸을 낳았다. 이승만과 이기붕, 그리고 윤비등의 일부 사람들 외에는, 일반 국민에게는 그당시 상황이 너무 험악해서, 신문에 발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알고있다. (이왕 은의 일본 추방 기사가 난 시절: 1952 년 4 월 4 일 조선일보)

일월오악도에 나온 이정자의 증언이란 이야기는, 이정자와 영친왕의 딸의 이야기를 함께 섞어서, 증언자나 또는 그 책 저자에 의해서 편집된 이야기이다. 저자 안천씨의 나이로 보아(60 대: 신문 기사로 알음) 그분이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인가 소문을 들은 것이 확실하다.

1944 년 일본에 있었다는 이정자는 영친왕의 한국 약혼자 이정자(가명)로서, 이정자가 일본에 드나들면서 영친왕 이은을 접촉하였고, 해방 후에 이방자와 이혼한 영친왕 이은과 함께 두분이 일본을 떠나 도망쳤는데, 히로히토 하인들(일본인들과 친일파가 연결되어있다)에게 또 당하였고, 그래서 딸을 낳고 사망했다.

한국에 영친왕 이은과 이정자(가명)의 기록이 이승만 시절에 있었는데, 1962 년 일본여자 이방자가 들어와서 지웠다. 일본 여자 이방자의 음모는, 1950 년대 영왕 이은이 한국여자 이정자와 일본을 떠나자,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 여자 이정자가 목숨을 걸고 일본에 들어가서 영왕 이은을 구출하였는데, 일본인들과 이방자가 발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한국의 친일파들의 세력까지 배신해서, 윤비의 친일파 가족같이, 일가 친척들에게도 외면당하고 숨겨져있었는데, 누군가가 일월오악도 저자에게 증언으로 남겼다.

이정자(가명)는 별명이 유관순이라고도 했는데, 조선에서 태어난 이조말 양반 대감댁 따님으로, 1960 년 대 이후에 박정희와 일본 여자 이방자(마사꼬)를 지지한 모든 한국 남자들과 일가 친적의 배신까지 겹쳐서 지금까지 숨겨졌다.

한글 학자 한갑수와 연결되어있고, 증언과 같이 일제시대에 상당히 고생을 하면서 살았고, 그러다 영왕 이은과 결혼했는데, 딸을 낳고 곧 죽었다. 무덤은 원래 충청도 아산에 있었는데, 1960 년 부터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서, 이장이 됬는지 그 자리에 있는지 지금 불확실하다.

이상은 한국여자 이정자(가명)와 영왕 이은의 사이에 난 딸의 증언으로, 일월오악도에 영친와의 딸로 기록된 이정자에 관한 이야기를 일부 그 진실을 밝힌다. 영친왕의 딸에 관해서는 일부를 작년 2008 년에 이미 위키에 증언 기록을 남겼다.

일월오악도 1권 328페이지에 나오는 이정자씨의 증언을 대충 요악하면..

"저는 1944년 8월 26일에 일본 후꾸오까현에서 태어났다고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원래 전주이씨로 태어났는데 황태자였던 영왕의 딸이었습니다. 영왕이 저를 비밀리에 학성이씨인 저의 양부에게 거대한 생육자금과 함께 맡겼는데 1945년이 되어 독립이 되자 저의 양부모는 생육자금이 탐나서 그것을 챙기고 저를 시골집 깊숙이 숨기고 학교를 보내지 않고 자신들의 딸로 입적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막일만을 하면서 배운 것도 없이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주입니다. 저는 황태자 영왕이 몰래 독립운동을 하면서 낳은 딸입니다. 영왕은 강제로 인질이 되어 끌려가 있다가 방자여사에게 치욕적 강제결혼을 당했지요. 그러나 인질이 되어서 숨죽이고 있던 영왕이 그냥 잡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비밀리에 측근들을 시켜서 독립운동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기록으로 남거나 알려지질 않 아서 일반인들이 모를 뿐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황통이 끊길 것을 안 영왕은 측근을 시켜 비밀리에 가까운 친척 여인(영왕의 고모뻘)을 통해서라도) 황손을 낳아야겠다고 자손을 낳았는데 그만 딸을 낳았고 그 딸이 바로 저입니다. “

일월오악도 하권, 1997년 안천 저


아버지가 옛날 왕하던 이왕 은의 딸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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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이은의 기록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멸망하면서 황태자 영왕이 일본의 인질이 된 사건과 함께 아직 결말이 나지않은 영친왕의 한국부인에 관한 조사가 남아있읍니다.

1. 해방 후인 동경에서 1947년 하야 선언을 한 이왕 은께서, 이승만대통령 시절인 1950년과 51년경에, 한국 귀국을 시도하면서 한국 여인과 결혼하고 그 한국부인이 임신한 일이 있읍니다.

2. 당시 이왕 은께서 동경에서 하야를 선언한 후에, 1950년-51년경 한국 귀국을 시도했던 시기에, 당시 일본에게 압력을 받은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바로 그 무렵에 영친왕 이은이 일본에서 “국외 추방령”을 받았다가 해제된 1952 년 4월 4일자(금) 조선일보 문서기록에 “日 李垠 추방해제” 라는 기사가 있읍니다. (참고: 조선일보 1952년 4월 4일자)

3. 그 한국부인의 신원은 “한씨 부인으로”, 한글학자 한갑수씨와 연계되어있고, 정치적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대통령 당선자와 연결되어 있었읍니다. 한갑수씨는 이기붕씨의 비서였읍니다. 1950-51년 한국 동란 시에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서울 시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이기붕씨는 6.25 전쟁의 혼란 속에 빠져있을 때였읍니다. 즉, 그때에 영친왕과 한국부인에게 생겨난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판단되었읍니다.

4. 영친왕 이은의 한국부인과의 결혼을 분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일본왕 히로히토와 마사꼬(방자)였고 이들은 영친왕을 방해한 책략을 꾸몄읍니다. (영친왕 딸이 부모를 잃게된 사건에 일본이 개입됬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일월오악도에 학성이씨라고 알려진 분이 "그 왜놈들이 하도 조그마한 것들이라서,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이렇게 만들었다" 라고, 미국에서 일본과 중국인들을 비교하는 이야기 중에 일본을 무의식 중에 그렇게 지칭했음〉

한국부인은 딸 출산 후에 사망하였고, 영친왕은 폭력을 당했는데, 그 때에 머리를 흉기에 맞은 것으로 알려졌고, 애기 딸도 완전히 무사하지 못했고, 그때에 딸에게 생긴 상처가 영친왕이 당한 폭력 사건의 증거입니다. 50대 중반의 연령이었던 영친왕에게 직접 폭력을 가한 당사자와 일어난 정확한 년도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한국부인 사망 후와 영친왕 딸 3살 이전 사이 기간으로 추측합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사건 연도로 미루어 범인이 최소한 1935년도 이전 출생일 것이고, 나이로 미루어서 해방 후의 출생자와는 관련이 전혀없음을 확증할 수 있읍니다, 영친왕이 그 사건을 한국 정부에 조사 의뢰했는지에 관해서는 불확실합니다.

5. 확실한 것은 영친왕은 1956년 이후에 일본에서 다시 방자(마사꼬)에게 잡힌 일제시대의 볼모와 같은 처지가 되였고, 지금 기록에 따르면 1957년 한국정부와 여권사건을 일으킨 후에 일본여권으로 바꾸어서 1958년 미국에 왔었다고 되어있읍니다.(이방자 관련 증언 기록들) 이 때에 문제가 된 것은 영친왕의 한국 여권이었지, 일왕실 친척으로 일본 국적을 지닌 일본여자 방자(마사꼬)의 여권이 제1공화국 한국에서 발행될리가 만무합니다. 영친왕의 한국 여권을 일본 여권으로 바꾼 원인은 1957년 당시에 영친왕과 일본여자 방자(마사꼬)가 각각 남한과 일본으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인데 (증거 추적 가능성), 한국부인과의 결혼 시에 영친왕이 일본 여자 방자와 헤어졌었다고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사건입니다.(영친왕 딸이 직접들음) 일본여자 방자(마사꼬)는 한국 제1공화국 시절에 남한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었읍니다. 한국 제1공화국 시절에 남한 국적의 소유자는 영친왕과 새로 결혼한 한국부인이었읍니다.

6. 그때의 사건이 결국 영친왕이 뇌혈전증으로 50년대 후반에 내내 시달리다가 (58년 쥴리아가 영친왕을 만났을 때에 이미 병자였다는 증언) 결국 뇌혈전증과 실어증으로 (뇌의 부상이나 질병으로 언어를 부분적 또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사용이 불능해진 증상) 인한 완전 불구로 1963년 귀국하시게 된 원인입니다.

7. 영친왕 딸이 영친왕과 마지막 함께 있다가 헤어진 때가 3 살 무렵인데, 한참 말을 배울 때였읍니다 (1955 년경: 의친왕 사망한 해 무렵). 마지막 날 하루종일 영친왕은 그딸을 데리고 주무시고 계속 무릎 위에 안고계셨읍니다. 그 때에 영친왕이 그 딸을 하루종일 데리고 하신 일은 그분의 이름 이왕 은(“아버지가 옛날에 왕하던 이은”) 을 기억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연습시키고 암기시킨 일이었읍니다. 그 때에 윤비도 함께 계셨는데, 그 할머니께서는 다른 방에서 주무셨읍니다. 이 때에 영친왕이 그 딸을 데려가고 싶어하셨는데 그 할머니(윤비)께서 안된다고 하시면서 (“한국에 그냥 놔두라고 하신 내용이었음”) 영친왕 딸에게 “할머니에게 안올거냐”고 하도 성화를 하셔서 영친왕( 할아버지 모습) 품에 안긴체 그 할머니 눈치를 보다가 할수없이 그 딸이 영친왕 무릎에서 내려와 윤비에게 간 것이 그만 마지막이 되었읍니다. 이 때에 윤비께서 영친왕의 건강이 이미 좋지않으시다고 걱정하셨던 말씀을 영친왕 딸이 아직 기억하는데, 이들을 영친왕 딸은 오랬동안 왕하던 이씨 집안 친척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로 기억하고 살았는데, 같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인 이기붕 친척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왕에 대해서 이방원 태종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혼동을 일으켰읍니다.

의친왕의 세째 딸 이해춘(사당궁 사진에서 확인)이 영친왕 딸이 영친왕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3살 때에 데리고 다녔읍니다. 이해춘과 누구인지 모르는 또 다른 두 여인이 영친왕의 딸에게 마지막으로 1958년경에 찾아왔었고, 윤비(사진에서 확인)께서 1959년경에 다시 마지막으로 영친왕 딸을 찾아왔었읍니다.

8. 영친왕의 딸은 한국부인 사망 후에 한국 귀국에 실패한 영친왕과 헤어져서 한국에 혼자 남아있을 때에, 이기붕 부대통령의 당선자에 의해서 농사를 짓는 그의 먼 친척집에서 키워졌는데, 이 집안 관계를 영친왕 딸에게 설명해준 분은 1959년경에 윤비였고, 의친왕딸 이해춘등도 알고 있었읍니다. 1959년경에 마지막으로 윤비가 영친왕 딸을 찾아오셨을 때에 이승만 이기붕 대통령 선거( 60년 3.15 선거) 후에 아버지가 오시어 함께 살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영친왕 딸은 국민학교 때에 이기붕 부대통령 당선자의 자살 기사를 읽은 후에 윤비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2005년 후에야 윤비의 설명을 알아들었읍니다.

1959년경 이미 3 살경의 기억이 흐렸던 영친왕 딸에게 윤비께서는 영친왕 딸의 “할머니(대비)도 되시고 큰엄마(혈육상)도 되신다”고 설명하셨는데, 후에 영친왕 없이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않아서 “그 할머니도 되고 큰엄마도 된다는 할머니가 도데체 누구였나” 하고 이따금 생각하곤 했던 정도였읍니다. 영친왕 딸에게 설명을 끝낸 윤비가 떠나시면서 혼자 중얼거리신 말씀은, 깊은 한숨과 더불어서 “하루속히 속좀 편하게 살아야 할텐데…” 였읍니다.

그리고 1960년경 후반기 쯤 누군가가(남자) 영친왕 딸을 완전히 꼬부랑 할머니 모습을 한 이씨 친척 집에 데려간 적이있는데, 너무 거처가 가난해서 영친왕 딸을 데리고 있을 처지가 안되니 영친왕 딸이 있던 시골집 (베이비시팅을 하던 이기붕씨 먼 친척을 말함)에서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읍니다. 그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모두가 그 할머니에게(나이와 상황으로 보아서 의친왕비 김씨로 여겨짐) 매달려서 그 방 하나에서 모두 모여 산다고 했는데, 국민학생이었던 영친왕 딸이 보기에도 당시의 농사짓는 시골보다 더 가난해 보였읍니다. 그때 어떤 중년 나이 정도되는 아들같은 남자가 그 할머니 방에 들어왔었고, 그 할머니에게 영친왕 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읍니다. 그 할머니가 그때 사정이 아직 편하지 못하니 영친왕 딸더러 시골에 다시 가있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영친왕 딸을 데려갔던 사람이 다시 그 시골로 데려다 놓았읍니다.

9. 그러나 1961년 이후에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읍니다. 바로 영친왕이 일본에서 완전히 쓸어지시고 일본 여자 방자(마사꼬)가 한국에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해입니다. 불구가 된 영친왕과 함께 1963년 한국에 들어온 일본여자 방자는 한국의 제1공화국 시절인 1955년에 이미 만들어져있던 영친왕의 한국부인과 영친왕 딸의 기록을 은폐시키고〈일본이 관련된 상황에 대한 증언이 있었음〉, 해방 후에도 영친왕이 마치 일본 여자 이방자와의 결혼 생활 만을 한 것같이 위장했읍니다 (참고: 이방자 기록). 의친왕비 김씨는 1964년 사망, 윤비는 1966년 사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있읍니다. 2005년 후에야 이때 사정을 영친왕 딸이 이해하게 되었읍니다.

10. 그 3살 때에 영친왕과 헤어진 딸은, 아버지에 대한 혼동이 있었지만, 1961년 이후부터 주변에 의해 속아 살다가, 1967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호적 입적절차 편집이 완전히 그 시골집으로 끝났고, 그 사실을 미국에서 2005년에 알게되었읍니다. 그동안의 주변인들의 상황들을 종합하면, 영친왕의 한국 귀국 후에 영친왕 딸을 속인 그 음모는 일본 여자 방자(마사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당시 상황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알지 못해서 밝힐 수 없는 사건이 영친왕 딸에게 있읍니다.)

2006년에 일본이 만든 무지개 왕비의 인터넷 내용에서 일본여자 이방자와 부부사이가 좋아서 귀국을 포기했다는 일본의 거짓말이 드러났읍니다. 인질로 1907 년에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의 역활은 일제식민지 정책을 위해서 일본이 입혀준 옷을 입고 사진모델 역활을 하면서(일본이 필리핀에서도 포로사진을 가지고 위장한 그런 짓을 하였듯이) 이방자의 24 시간 감시하에 살았고, 지금까지도 교활한 이방자가 1970 년 영친왕 사망 이후에 제멋데로 영화를 만들면서 가지고 놀았읍니다. 이방자는 영친왕이 일찍 사망한 것이 아주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친왕을 실어증 환자로 만들어서 남한에 함께 들어온 후에 철저히 남한을 일본 경제 식민지로 또 착취하기 시작하고 일본의 이득을 위해서 철저히 헌신한 히로히토 스파이 역활을 죽을 때 까지하던 아주 못된 일본여자입니다. 수녀까지 이용해서 철저히 일제시대를 합리화한 여자입니다. 아들 이구까지도 그 애미의 역활을 좋지않게 생각한 여자로서, 이구와 불화의 원인이 된 이유입니다.

11. 이왕 딸은 1970년 영친왕 사망 직전인 숙명여고 시절에, 학교에서 영친왕의 한국부인과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와 그 딸의 이름을 들었고 또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영친왕의 딸과 “동명이인” 인줄 알고 그렇게 대답하고, 그 후에 계속 그렇게 알고 살았읍니다. 그 때에 숙명여고에 연통을 넣은 분들이 자유롭게 영친왕에게 그 딸을 데려다 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당시에 일어났던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사건이었읍니다.

지금 한국의 인터넷에 시비가 붙어있는 한국실제공주 존재 여부 의 당사자는 바로 영친왕 딸 이야기로,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유포된 시기는 바로 영친왕의 사망 직전인 숙명여고 시절입니다. 그 동명이인이라고 대답한 그 영친왕 딸이 경복궁 공주라고들 말했는데, 영친왕 딸이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 말했읍니다.

12. 영친왕의 딸이 태어날 당시 미국 유학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구도 영친왕 딸의 사건을 알고있었고, 그래서 영친왕 사망 후인 1973년 이화 여대생이던 영친왕 딸을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한일 정치적 문제와 함께 생겨난 각각의 모친의 분쟁 사건이었기 때문에, 영친왕의 딸을 영친왕의 뜻데로 이왕 이은 호적 기록에 다시 회복시키지않고 헤어졌읍니다. 그 당시의 이구의 말로 미루어보아 영친왕이 당했던 폭력 사건을 알고 있었는데, 영친왕 딸을 만나 사실 확인을 한 것같았고, 영친왕 딸은 이구가 그녀의 신체에 대한 모욕을 하는 줄 알고 화를 낸 적이 있었읍니다. 이때에도 영친왕 딸은 이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고 지방 대학 교수인줄 알고 만났읍니다. 이구가 영친왕 딸을 알고 처음 찾아온 장소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교 였는데, 그날 그 사무실에 남쪽 지방에서 온 교수 시찰단들이 많이 있었기에 그렇게 영친왕 딸이 착각했읍니다.

2005년 영친왕에 대한 기록 조사 중에, 영친왕 딸은 이구가 일본에서 살고있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어떻게 그를 찾아서 확인을 해야하나 궁리 중이었는데, 이구 장례 뉴스를 보았읍니다. 이구를 결정적으로 기억에서 구분한 것은 2005년 그의 장례식 사진을 본 후에, 그 때 모 대학에 찾아온 이구가 할 말이 있으니 학교 밖에서 조용히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요청으로, 영친왕 딸이 지정한 서울 안국동 한국일보 빌딩 식당에서 정식 첫대면을 하였는데, 이야기 도중에 그가 영친왕 딸 앞에서 줄줄 흘린 눈물 콧물입니다. 이구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대목은 영친왕 딸이 3살 무렵의 그 할아버지(영친왕)에 대한 기억을 그에게 이야기했을 때 부터였읍니다. 전혀 모르는 교수가(40대 초반 사진과 같음) 갑자기 식당에서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안하고 줄줄 흘린체 앉아있어서 대학 졸업반이였던 영친왕 딸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읍니다. 그데로 놔두면 계속 그런 상태로 앉아있을 것같아서 보다못한 영친왕 딸이 손수건을 그에게 주면서 화장실가서 얼굴을 닦으라고 할 때까지 눈물을 흘리고 앉아있었읍니다. 이때에 이구가 1955년 이전의 영친왕 딸 주변 상황에 관련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이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영친왕 딸에게 다시 단서가 되었읍니다.

1973 년 서울에서 이구가 일월오악도의 학성이씨 시골 사람들로 알려진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영친왕 딸을 만나 그 실체를 확인한 후에, 영친왕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였고, 그것이 이구의 눈물의 의미이고, 그래서 남한을 떠나 일본으로 귀국했을 것입니다. 영친왕 딸과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에, 자기는 그 한국 남쪽에 있는 나라로 아주 간다고 말했읍니다. 그 한국 남쪽에 있는 나라가 탐라국인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니뽕국이었읍니다. 일명 학성이씨 혼자 영친왕이 생육비로 맡긴 땅 때문에 영친왕 딸을 숨기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이구(이방자도)와 모두가 다 학성이씨 시골에 영친왕 딸이 살고있었다는 것을 알고있었읍니다. 그 땅만 학성이씨한테 빼앗아 갈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학성이씨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영친왕 딸을 방패막이로 삼았던 사건도 있었읍니다.

13. 이 기록은 2005 년 이후에 영친왕 딸이 영친왕에 대한 기록들을 조사한 후에 영친왕 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기억들과 대조하고,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에 대한 사실에 대한 본인 자신의 심리적 확인을 바탕으로 기록하였읍니다. 생모에 대한 부분에서 가장 애를 먹었는데, 영친왕 딸은 한갑수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영친왕의 한국부인은 한씨입니다.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생모가 약혼자였다는 민씨가 아닐까도 생각했었는데 (일제 시대부터 연결된 약혼자 또는 애인 운운하는 말을 들었음), 출산 나이와 사진을 보고 아니라고 판단을 하였읍니다. 한씨 부인도 출산 시에 젊은 분은 아니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1950 년대 사건들이 있는데, 민씨나 방자(마사꼬)보다는 약간 젊었던 나이로 측정되고, 독립 운동하는 분들과 손을 잡고있었던 상황으로, 영친왕 한국부인과 일본 왕실 친척인 방자(마사꼬)는 서로 완전히 "한국 독립군 vs. 일본" 이라는 반대 입장이었던 것으로 영친왕 딸이 알고있읍니다.

영친왕 딸의 이야기는 지금껏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영친왕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는 이야기인데, 지금 일본여자 이방자(마사꼬)로 인해서 잘못 알려진 이왕 은(영친왕) 사건을 바로 잡고, 또한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옛날에 왕하던 아버지 이은" 을 그 이름이라도 다시 찾기 위함입니다. 영친왕 딸 이름은 의친왕 집안에서도 알고있는 동명이인 그 이름입니다. 영친왕 딸은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는 재미 교포입니다

해당 내용에 관한 의견

일단 '일월오악도'라는 서적이 출처가 될 수 있는지 불분명하며, 위의 내용은 전혀 백과사전적이지 못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6일 (금) 18:49 (KST)답변

영친왕이 왜 왕입니까?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대한민국때의 사람인데 1970년까지 재위기간이 웬말입니까 대고려인 (토론) 2009년 3월 10일 (화) 20:23 (KST)답변

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이 아니라 '황실 수장'으로서의 재위기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3월 10일 (화) 20:31 (KST)답변
황실이 멸망하였는데 '황실 수장'으로 보는 규정도 있는지요? 대고려인 (토론) 2009년 3월 10일 (화) 20:36 (KST)답변
본인들끼리 만들어서 쓰는 명칭입니다.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참고 바랍니다.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는 직위라도 기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언어판에서도 폐지된 왕정의 정통성 계승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3월 11일 (수) 01:02 (KST)답변

이은 황태자

보편적인 면으로 따지면 영친왕이 문서의 제목으로 적합하겠지만, 이미 대한제국 시절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니 이은 황태자로 바꾸는게 어떨까요? "의민태자" 호칭의 경우,

  • 첫째, 보편성에서도 떨어질 뿐더러
  • 둘째, 생전에 단 한 번도 불린 적이 없는데다가
  • 셋째, 공식적인 호도 아니니

백과사전의 문서 제목으로서 별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적절한 제목은 이은 황태자 정도가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고종도 말년에 이태왕으로 강등되지만 결국 태황제의 시호를 받았고, 순종도 말년에 이왕으로 강등되지만 결국 효황제의 시호를 받은 전례도 있으므로)--LightofFullMoon (토론) 2011년 1월 12일 (수) 13:54 (KST)답변

의민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붙인 시호이므로 공식 시호가 아닙니다. 의민태자는 적합한 표제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휘인 "이은"을 쓰기도 그렇고, 잠시 썼던 궁호인 "영친왕"도 그렇고 애매하네요. -- ChongDae (토론) 2013년 1월 11일 (금) 17:03 (KST)답변
황태자 이은 정도가 괜찮을 듯 보이네요.--아드리앵 (토론 · 기여) 2013년 7월 26일 (금) 23:56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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