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환단고기/보존문서1

현재 환단고기가 사학계에서 위서로 보는 것이 "정설"이라면

현재 환단고기가 사학계에서 위서로 보는 것이 "정설"이라면, 위키백과도 마땅히 그에 따라 기술해야 합니다. 정설로 된 것을 먼저 소개하고, 그 외에 민족사학계의 이론을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민족주의 사학계에서 그 진실을 증명하려고 연구중이다" 역시 NPOV와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환단고기가 증명될 수 없다는건 현재 명백합니다. 증명될 때 까지는 누가 뭐래도 기존 사학계의 입장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 Caffelice 2004년 9월 8일 (水) 13:14 (UTC)

환단고기는 위서다

Caffelice는 위서논쟁이 있는 책들 중 규원사화는 북애자의 원본이 발견된 이상 논쟁의 여지가 되지 않고, 화랑세기는 위작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만 환단고기는 짤없이 위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구려국왕일람, 백제국왕일람, 신라국왕일람, 고려 (국호), 조선 (국호) 들어가서 왕들의 역대 재위년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영조나 고구려의 국조왕(태조왕)처럼 재위년대가 긴 왕도 있지만 이런건 극소수입니다. 십여년이 멀다하고 왕위가 바뀌는게 "정상" 입니다. 규원사화의 단군조선 단제들의 재위년대를 살펴보면 그런대로 납득이 갑니다. 오래 집권한 단군이 있는가 하면, 몇 년 되지 못해 자리에서 물러난 단군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다.

그런데 환웅들의 재위기간은 평균 1세기에 가까우며, 환인들은 3301년동안 겨우 일곱 임금이 다스렸답니다. 이게 "상식"의 범주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환단고기에 따라 9억의 인구를 거느렸던 옛 조선의 유적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목민족인 흉노조차 거대한 무덤군을 남겼습니다. 그 거대한 대제국의 도시 유적이 하나도 안 남아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애초에 환국이니 이런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 Caffelice 2004년 9월 9일 (木) 03:31 (UTC)

그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인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고, 이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기술하는 것도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므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See en:Wikipedia:Neutral point of view#Concerns_about_.22writing_for_the_enemy.22 --PuzzletChung 2004년 9월 9일 (木) 04:13 (UTC)

천문현상으로 본 환단고기의 허구성

독자 연구 성향의 본인의 의견을 취소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일 (금) 12:06 (KST)답변

환단고기인가? 한단고기인가?

전 위서냐 아니냐는 문제는 피하고, ‘桓’의 발음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桓’의 발음은 ‘환’입니다만, ‘한’으로도 발음이 됨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桓’을 일반적으로는 ‘환’이라 발음을 합니다. 하지만, 고유명사 쪽으로 넘어가면 ‘한’으로 발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결국 ‘환단고기’냐 아니면, ‘한단고기’냐 이것에 대해 토론을 하고자 합니다. 曹操孟德 2006년 2월 26일 (일) 09:20 (KST)답변

한자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예전에 환도성(丸都城)을 ‘桓都城’으로도 적었다는군요. 그렇다면, 만주 지방에서도 ‘桓’의 발음은 ‘丸’과 같다는 말인데, ‘丸’이 ‘한’으로
발음되는 일이 있나요 ...
이 내용으로 볼 때에 제 생각에는 ‘환’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진위 판정을 젖혀두고 토론할 정도로 책의 발음이 중요한가요 ... jtm71 2006년 4월 9일 (일) 21:34 (KST)답변

어찌된 것이죠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1979년에 공개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환단고기 위서론을 보면 벌써 1977년에 《月刊中央》9월호에 송찬식이 〈僞書辨〉을 쓰고 있네요? -- 리듬 2006년 4월 9일 (일) 21:51 (KST)답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뭉게구름 2006년 4월 11일 (화) 23:55 (KST)답변
월간중앙의 내용을 확인해 볼 수 밖에는 없을 듯한데 ...
[1]역사바로세우기 사이트를 참조해 보면, 환단고기가 아닌 규원사화에 대한 내용인 듯합니다. 이 서적은 참고도서에서 제외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jtm71 2006년 4월 16일 (일) 04:14 (KST)답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확인했습니다.
청구기호, 051-중419 입니다.
단기고사, 규원사화, 죽서기년(竹書紀年)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참고도서에서 뺍니다.

환단고기의 인용도서에 대한 문제점

독자 연구 성향의 본인의 의견을 취소합니다. jtm71 (토론) 2008년 10월 3일 (금) 12:06 (KST)답변

본문 내용의 문제점 지적

다음 내용은 최종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1) 북한 학계의 고조선력사개관에서 환단고기를 인용한 부분이 있는지 ... 있다면, 구체적으로 '~ 부분은 환단고기에서 인용하였다.'라고 언급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여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환단고기가 아닌 규원사화를 인용했습니다. 그 연대 또한, 전조선 1,500년, 후조선 500년으로 되어 있고요. 관련 링크: [2]

2) 환단고기를 인용한 서적의 정신철학통편에서 정말로 '환단고기'를 인용했습니까 ... 책을 구할 수 없어서 확인이 불가한 내용인데,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로는, 환단고기가 아닌, 환단고기에도 실려 있는 '천부경'을 인용했더군요. 천부경은 신채호도 언급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신채호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를 몰랐죠. 만일 본문에 기록을 유지하려면, 구체적으로 환단고기에서 인용한 구절을 언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련 링크: [3] jtm71

정신철학 통편

한단고기 내용 자체를 인용한 것이 아니고 1949년 조작설의 반론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원문이 게재된 사이트 주소는 http://www.khaan.net/cgi-bin/technote/read.cgi?board=khaan_history&y_number=10 입니다.

원문 "1920년 북경 정신철학사에서 전병훈이 펴낸 책으로 원래 제목은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이었다.

이책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위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동굴 석벽에서 천부경을 보고

1917년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영변의 백산(白山)으로 들어갔다가 천부경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묘향산과 백산이 같은 곳임은 "영변군지"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는 문자의 차이일 뿐이다.


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뭉게구름 2006년 4월 18일 (화) 09:20 (KST)답변

제 글에도 동일한 링크가 있습니다. 글을 잘 읽어보시면, 천부경의 입수 경위에 대해서만 나왔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연수의 환단고기에서 천부경을 인용하였다고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1979년에 출간된 환단고기에서도 천부경을 같이 인용했을 뿐이죠. 천부경이 1930년대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천부경과 환단고기는 별도입니다. 이는 환단고기의 공개는 금했으면서도 천부경은 널리 알려지도록 했던 것으로도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글로는 그 당시에 환단고기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주장의 중요성에 비해 그 논거가 부족합니다. 정신철학통편은 전문이 수록되어 있는 지는 몰라도 현재 간행되고 있는 책이 있으니 그 내용을 확인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jtm71 2006년 4월 18일 (화) 18:32 (KST)답변
정신철학 통편은 빼는게 좋겠습니다. 성급한 생각에 추가됐네요. 뭉게구름 2006년 4월 18일 (화) 19:54 (KST)답변
내용 확인했습니다. 전체 내용을 모두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원문에서 천부경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는 태백일사나 환단고기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jtm71 2006년 4월 22일 (토) 14:55 (KST)답변

국내, 일본, 중국 학계의 입장

국내 역사학계의 부정적인 반응에 반해 북한·일본·중국은 이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북한은 《규원사화》·《환단고기》·《단기고사》 등을 국사 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일본은 가시마 노보루가 1982년 펴낸 일역판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 책은 일본의 역사이며 아시아의 지보”라고 극찬하며 더 나아가 《일본서기》는 위서며 《환단고기》를 일본 역사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서문에 나카소네 총리를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 1040명의 추천서를 첨부했다.

중국의 경우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학자들의 논문에 《환단고기》가 인용되고 있다. 이는 중국학자들도 이 사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중국 정부는 1980년대부터 정치적인 목적 하에 중국 역사 5대 프로젝트를 전개해 왔다.

신해혁명 당시 한족 부흥 구호 아래 ‘멸만흥한(滅滿興漢)’을 부르짖었던 중국은 1949년 인민공화국을 건립하면서 오족공화(五族共和)를 주창하고 나섰다. 이는 중국은 5대 민족이 이룬 나라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 후 56개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자손’을 주창했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시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신화에서 역사로 끌어내려 삼조당(三祖堂)을 건립하고 염황치자손(炎黃蚩子孫)을 부르짖었다. 이것이 탐원공정(探源工程)이다. 이 탐원공정은 중국 민족의 시조인 황제가 치우와 같은 동시대 인물이어서 《환단고기》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교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북공정은 주지의 사실처럼 만주지역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지배 사실을 공고하게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만주를 지배한 선 역사인 고구려를 ‘중국의 고대 변경민족정권’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기본 취지에서 ‘고구려 문제에서 발생 가능한 쟁점 부분’을 제시함으로써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한의 미래와 남한의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속내를 강하게 비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next.joins.com/article/?nID=511

일본 관련 내용은 앞은 같은데 뒷쪽은 차이나 납니다 뭉게구름 2006년 4월 22일 (토) 13:41 (KST)답변

일본어판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천황의 계보의 실제성을 주장하려는 의도였을 듯합니다. 관련 링크: [4]
'환단고기는 위서이나 진실된 부분도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역사학자들이 참조하고 있다'라는 설명은 너무나 애매한 설명입니다. 그런 단서에 의해 이러한 추측마저 가능한 것입니다.
나카소네 총리는 대표적인 우익의 총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적이지 못한 내용을 지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익입니다. 유감스럽습니다만, 일본 우익인사들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명단은 모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조선력사개관》은 시중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내용을 직접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위에서 주장하는 것 같이 환단고기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의 예를 들고는 있으나, 단기고사의 2천 년 간 47대의 주장은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 대한 설명 또한, 실제의 예를 들지 못하고 있으며, 내용도 제시되지 않습니다. 논문에 등장하더라도 인용이 아닌 단순한 언급일 것이며, 치우천왕이나 탁록의 전투가 실재했던 역사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이들 기록은 규원사화와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만큼, 20세기 말에나 알려졌고, 위서임을 의심받는 환단고기에 그 출전을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jtm71 2006년 4월 22일 (토) 15:42 (KST)답변
북한 학계 입장, 일본 학계 관련 내용을 삭제했는데, 이전 내용으로 복원되었네요. 뭉게구름 2006년 4월 23일 (일) 11:18 (KST)답변
역사’ 보는 법을 모르시는군요. 제가 그랬습니다. 토론으로 의견을 끌어낸 다음에 지운 게 맞는 겁니까? --Puzzlet Chung 2006년 4월 23일 (일) 11:21 (KST)답변


역사 보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고조선력사개관 부분이 바르지 않고 삭제를 요청 하셨고, 그 부분은 제가 추가했더 부분이었습니다. 일본 학계 부분은 위의 인용 부분을 필요한 부분만 인용한 것으로 보여 그 부분도 삭제했습니다. 복원됐다고 한 것은 요청한 분에게 의견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뭉게구름 2006년 4월 23일 (일) 11:27 (KST)답변

환빠 운운하는 네티즌들은 먼저 자기자신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환단고기는 남한의 식민사학계(그들 스스로는 강단사학계라고 주장)에서 위서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환단고기는 많은 부분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후대의 위작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한민국의 식민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판정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또한 부정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계는 환단고기가 위작인 것은 분명하나, 어딘가 다른 사료에 기반해 있어 연구의 가치는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의 객관적인 접근의 비해 남한의 식민사학계는 환단고기에 대한 감정적인 접근으로 환단고기의 모든 기록은 100% 쳐다볼 가치도 없다고 치부한다. 실제로 환단고기나 일본서기 모두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한국인들이 일본서기를 판타지로 치부하지만 일본서기의 모든 서술을 100% 부정하지는 않는다. 환단고기역시 마찬가지이다. 네티즌들중 식민사학계의 통설을 믿는 이들중 일부는 환단고기를 언급하는 즉시 수구꼴통세력이 박정희를 찬양안하는 모든 사람을 빨갱이로 몰듯이 "환빠" 운운하며 거의 소설가취급을 한다. 물론 환단고기를 모두 믿는 사람도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병도를 중심으로한 식민사학이 지배해온 기존의 한국학계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는 참신한 역사학도들은 환단고기의 기록을 맹신하지 않는다. 실제로 환단고기의 기록중에서 정말로 믿을수없는 것도 있다.그러나 근세조선 성립이후 기자를 시조로 믿고 성리학적 질서와 중국에 대한 숭배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않은 500년 세월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제대로된 역사서를 쓸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를 편찬한 이들은 극단적인 민족중심의 역사를 씀으로서 민족의 역사를 이어가려고 했을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많은 부분이 과장된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환단고기의 모든 기록이 100% 날조이고 환단고기의 기록 단 한자도 쳐다볼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식민사학계는 분명 자기기득권 지키기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북한학계는 환단고기의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인정하여 환단고기의 많은 과장된 부분과 설화적 요소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내려는 작업을 예전부터 하고있고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세뇌된 네티즌들 역시 환빠 운운하기전에 자기자신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일부 담고있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때의 편찬된 사실이 밝혀졌지만 기존사학계는 이에대해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언급하는 이들을 환빠운운하면서 몰아붙히기 전에 환단고기 편찬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기 바란다. 민족의 역사를 성리학적 질서와 중국숭배일색의 분위기속에서 지키기 위해 환단고기의 편찬자들은 과장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확인되지 않은 구전설화를 그대로 적었을 수도 있다. 일본서기의 편찬자들 역시 일왕의 정통성확립을 위해 자신들의 선조인 한반도 특히 백제부분에서 온갖 과장과 왜곡을 했다. 그렇지만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정사라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의 모든 기록을 100% 부정하는 한국학자는 아무도 없다.환단고기 역시 그 편찬의 역사적맥락을 되짚어 보면서 객관적인접근을 시도하는것이 식민사학이 주도하고 왜곡될대로 왜곡된 한국역사를바로세우는 길이 될것이다

환단고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지말고 좀더 자기자신을 되돌아 보세요 59.15.6.185[5] 2006년 5월 24일 (수) 08:54


사학자들이 스스로 강단사학계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강단사학'은 스스로 '재야사학가'로 부르는 사람들이 지어서 부르는 명칭입니다.
개인적으로 사학계에서 다소 재야사서들에 대해 감정적인 취급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는 80년대 후반의 교과서파동에 의한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국사교과서가 이 지경이 된 것도 그 여파였다고 하더군요.
일본서기는 그래도 오래 전에 지어진 역사입니다. 1979년 이전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환단고기와는 다릅니다. 편견이 들어갔을 지언정, 현재 구할 수 없는 사료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 근거일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대부분은 기존의 자료에 근거하여 씌여진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자료들은 1979년 당시의 자료들로, 지금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료일 것입니다. 그 자료 중에는 물론 규원사화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환단고기에는 거짓된 부분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대체 그 거짓된 부분과 진실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까 ...?
jtm71 2006년 5월 24일 (수) 10:17 (KST)답변


나 참 제가 쓴 글을 읽기나 했습니까 국어공부부터 하셔야 겠네요 환단고기에서 거짓된 부분관 진실된 부분을 가를수 있는 명확한 기준????????? 열 받아서 글이 안써지네요 당신같은 사람한테 설명하는거 자체가 짜증나지만 반박을 안하면 다른 네티즌들이 오해를 하니 반박을 하죠 참 나원 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으면 역사학자와 역사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겠네요 일본서기의 상당부분 예를 들어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은 전혀 사실무근이지만 호류지를 지을때 화재가 나서 다시 지었다 이런것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거죠. 더 구체적인 예로 일본의 고서기에는 이츠세가 수군을 이끌고 야마토를 정벌하다 부상을 당하고 결국에는 죽습니다.그리고 그의 동생인 (진무덴노)가 바톤을 이어받아 야마토를 정벌하고 초대 덴노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무덴노(카무야카오이와레히코)가 야마토 정벌을 지휘합니다. 이 두 전설다 단군신화같은 판타지이며 이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일본학자들 중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고서기는 편찬연도가 일본서기보다 반세기가량 앞서 있습니다. 여기서 추측할수 있는것은 고서기의 기록대로 일본은 단군신화와 달리 정복민족(기마민족으로추정)이 일본 열도내의 민족을 정복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는데 고서기의 기록대로라면 그 정복민족은 두 번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즉 일본열도의 덴노가문은 한번 바뀌었다는 소리입니다.하지만 일본서기편찬자는 그걸 삭제하고 진무덴노를 유일한 정복자로 내세웁니다.그래야 태초부터 일본열도의덴노는 한 계통이라는 주장을 펼수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이츠세는 가야계통의 스진왕조 그리고 진무는 백제계통의 오우진왕조를 나타낸다고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라는 일본학자가 주장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합니까?

이런 식으로 신화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측해낼수있고 어떤 부분의 기록은 적혀있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위에 글을 다시 씁니다 <북한학계는 환단고기의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인정하여 환단고기의 많은 과장된 부분과 설화적 요소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내려는 작업을 예전부터 하고있고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모든 역사는 소위 정사라고 불리는 것도 편찬한 편찬자의 아집과 주관이 담겨있고 고구려 백제 건국연도처럼 왜곡도 서슴치 않습니다. 정사라기 보다는 국가권력이 편찬한 관사가 올바를 표현입니다. 당신말대로 어떤 역사서는 100%사실 또는 어떤 역사서는 어느것은 진실이고 어느것은 거짓인지 무자르듯 100% 가려낼수있으면 역사학은 왜존재하고 역사학자는 왜 있습니까?머리가 돌아는 가는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정말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북한학계는 환단고기의 이런 역사적 맥락을 인정하여 환단고기의 많은 과장된 부분과 설화적 요소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내려는 작업을 예전부터 하고있고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환단고기 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단고기가 소위 말하는 관사에 비하면 설화적 요소와 민족중심의 과장된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본서기는 갑자 2단위를 돌려서 기록하여 120년을 내려야 그 연대가 사실에 맞을 정도로 왜곡을 하고도 정사라고 불리는데 환단고기는 믿을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으므로 100%부정해야 된고 그책의 내용은 단 한자도 볼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체 그 저희가 뭡니까? 그런 식으로 그딴 식으로 따지면 전 세계의 모든 역사책은 왜 봅니까? 그리고 단국신화도 교과서는 곰토템신앙민족이 호랑이토템신앙민족을 밀어내고 한민족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당신 말대로 <<대체 그 거짓된 부분과 진실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까 ...?>> <------------------------- 따지면 단군신화도 그냥 환타지니까 그냥 깡그리 무시하지 곰토템신앙민족이 어쩌고 하는 해석은 왜 합니까 생각을 1초라도 하고 글을 쓰세요 어쩌니 저쩌니 해도 당신글의 요지는 "환단고기는 거짓된 부분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그 거짓과 진실을 100%가려낼수 없기 때문에 쳐다볼 가치도 없고 단 한줄 단 한자도 참고해서는 안된다" 라는거잖아. 하다못해 "환단고기의 역사적 사실을 추정해 나가는 작업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런작업을 할 거면 철저한 연대사료의 고증과 유물을 통한 사실적 접근을 해야 하며 그렇게 검증되지 않은 사실은 전혀 인정할수없다." 이런식으로 주장을 하여도 어느정도 토론이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쓰레기 글의 요지 "환단고기는 거짓된 부분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그 거짓과 진실을 100%가려낼수 없기 때문에 쳐다볼 가치도 없고 단 한줄 단 한자도 참고해서는 안된다" 는 욕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에서도 말하지만 환단고기만 나오면 박정희광신도가 빨갱이소리에 광분하듯이 눈에 불을 키지 말고 좀더 자기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추신 강단사학자들이 스스로 주장하는게 아니라 재야사학자들이 강단사학자라고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명칭이라고하셨는데 사실관계도 모르면서 정반대로 서술하지 마세요 당신이 주장하면 사실입니까? 강단사학자란 명칭을 강단사학자 스스로 자랑스럽게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일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재야사학자 "란 명칭은 소위 강단사학자들이 자신의 통설에 반하는 모든 사학자를 싸잡아 "재야사학자"로 몰아붙이기 위해 만든 용어가 지금도 그렇게 쓰입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라고 아마 모를 것입니다. 그분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사학자중 한명인데 강단사학자들은 서슴없이 재야사학자라고 "지정하고" 그렇게 몰아 붙입니다. 윤내현교수도 수십년간 계속되는 이소리에 멀마나 기가 막혔으면 "취미로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고 정규대학 사학과의 정교수이고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까지 하고온 나를 도대체 무슨근거로 재야사학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윤내현교수는 단국대하교 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치고 퍼시픽웨스터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으며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역사언어학부과정까지 수료하신 교수입니다. 윤내현교수가 이 글을 본다면 개인정보를 공개한데 대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하지만 이런 학위를 공개안하면 또 얼마나 교수님을 깔아뭉갤까봐 어쩔수없이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뻐기면서 말하는 그런 분도 절대 아닙니다.얼마나 기각 막혔으면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왔다는것까지 내세웠겠습니까? 정통적인 사학과 석사 박사과정을 모두 밟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언어역사학부과정을 수료하고 학생들에게 제대로 강의하기위해 교육학박사까지 받아서 박사학위도 문학박사 교육학박사 두 개나 가지고 있고 단국대라는 4년제 정규대학 사학과에서 20년이상 교수(조교수 이상)로 10년이상을 정교수로 강의하신분을 무조건 재야사학자라고 몰아붙이는게 지금 주류사학계의 현실입니다.윤내현교수가 오죽했으면 저런 소리까지 했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재야사학자들이 강단사학자들이라고 지어서 부르는 명칭이라고 거꾸로 말하는 그런거는 삼가해주십시오. 그리고 윤내현교수는 자신의 학설을 따르지 않으면학위도 주지 않는 그런 마피아적인 조직인 주류사학계에 비해 항상 하는 소리가 "나는 내 제자들에게 내학설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내 학설을 뛰어넘으라고 합니다.스승의 학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입니다.

그리고 윤내현교수가 더욱더 기가 막힌것은 역사학대회나 이런거에서 자신의 학설을 발표하면 최소한 같이 연구해보자 이런소리는 나올지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사하고 "땅 넓으면 무조건 좋은지 아느냐?"며 협박조로 하는것이 전부고 그것도 모자라 윤내현교수의 연구가 북한학계의 학설을 유포시킨다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위로 신고까지 한 사람들이 당신이 그렇게 강조하는 정사아니면 인정안하는 그리고 그 정사조차도 초기백제의 기록처럼 자기 입맞에 안 맞으면 인정안한느 강단사학자들입니다. 물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무죄판결 났습니다. Hkl7777 2006년 5월 25일 (목) 02:54 (KST)답변


(자신이 쓴 글은 읽어보시나요 ... 자신의 글을 스스로에게 썼다고 생각하고 되새겨 읽어보신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환단고기가 1979년 이전에 씌여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제 글은 그다지 길지도 않은데 이 부분을 뛰어넘으신 듯 ...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등장한 연대와는 맞지 않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드러나 보이는 거짓도 있고 의도적으로 숨긴 듯한 부분도 있는 데다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런 내용들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재야사학'이라는 말을 처음에 사용한 분이 누구인 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사학자들은 스스로 '강단사학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고,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아마도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강단사학'의 명칭을 만든 이들이 '재야사학'의 명칭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재야'의 명칭은 부르기 편하도록 사학자나 일반 언론에서 지었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러한 명칭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 보다는 스스로 '재야사학'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꽤 있는 듯합니다. (왜 말이 길어지나 했더니 논란이 있는 부분이군요. [6] 어쨌든, 명칭에 대한 설명은 순수한 제 주장은 아니고, S모 교수님의 책에 실린 내용이었습니다.
단군신화가 판다지라는 것은 의외의 주장이군요. 동물이 말을 하고 사람이 되기 때문인가요 ...
역사학자와 역사학을 존중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 그리고, 인신공격적인 글을 보면 '네티즌'을 내세울 만한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단군의 자손임을 주장하려 한다면 적어도 그런 언행은 삼가야 합니다. 단군팔조(기자의 팔조법금과는 다름)는 알고 계시겠죠 ...
개인적으로는 모 교수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단군은 실존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환단고기에 대한 인정은 다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역사를 왜곡한 예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학계에도 여러 학파가 있고, 주장하는 바가 서로 다릅니다. 일제 시대에도, 우리의 상고사를 없애려 한 학파가 있었던 반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영역을 일본으로 확대하려 했던 학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으며,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학은 매우 신중합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신중한 만큼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올바른 상고사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환단고기가 한국의 고대사가 있다/없다로 구분할 경우에는 사학계보다는 옳은 주장을 하는 셈이지만, 그것 말고는 더 나은 점이 없습니다. 삼국유사의 경우에는 오래 전에 씌여졌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희귀 서적들을 참조했기에 단어 하나도 소중히 여겨야 하겠지만, 환단고기는 하등의 그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원본도 있고 모순점도 발견되지 않는 규원사화를 놓고 어째서 환단고기에 매달리느냐 하는 점입니다. 규원사화는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특별히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백과사전이며, 이 곳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과의 약속입니다. 일반적인 블로그나 개인의 게시판과는 다르며, 이 곳이 만들어진 취지와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 곳에는 일반의 인정을 받는 내용이 씌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공정을 요구하는 분에게 함부로 불만을 표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jtm71 2006년 5월 25일 (목) 15:07 (KST)답변
진실의 열매는 향기가 나고, 거짓의 열매는 악취를 풍깁니다. 증거를 원하신다면 ... 질문하시는 그 글 자체가 첫번째 증거입니다.
궁금하네요. 대체 진정한 한국의 역사와 환단고기 중 어느 것이 우선입니까 ...
정말 역사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검증을 거치지 않는 내용을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독버섯의 종류를 확인하지 않고 그저 화려해 보인다고 아이에게 먹이겠습니까 ...
어느 숲에 있는 버섯을 먹고 한 번 크게 탈이 났다면 좀 더 조심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맛보는 것마다 모두 독이 들었다면 ...
그 숲은 독버섯의 숲이라고 규정하고 버섯 채취를 금지시키지 않겠습니까 ...
이미 본문에도 링크되어 있지만, 제주대 신문에서 제시하는 방향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jtm71 2006년 5월 26일 (금) 18:47 (KST)답변

결국 어쩌니해도 당신주장 환단고기는 단 한자도 볼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하나도 변함이 없잖아.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예의 운운하기전에 상대방논리를 하나하나 따져봐라 내글 을 다읽지도 않은것같네 . 반박할게 없으면 맞춤법걸고넘어지는 초딩처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희귀 서적들을 참조했기에 단어 하나도 소중히 여겨야 하겠지만, 환단고기는 하등의 그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등의 이유가 없어? 그러면 고기가 79년이전에 씌여지지않았다는 증거를 대."우리나라의 사학은 매우 신중합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신중한 만큼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올바른 상고사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소위실증사학은 신중한게 아니라 자기 기득권지키기다 삼국사기 심지어 중국사서에 수십차례에 나오는 백제의 산둥,요서진출을 증거가 나와야 한다며 인정한하는게 신중한거냐? 당신같은 사람은 토론할가치가 없는거 같아. 이병도 신석호와 그 제자들이란 글 읽어보고 실증환단고기같은 책이나 읽어보고말해라 -- 이 의견을 2006년 5월 26일 (금) 15:46에 작성한 사용자는 59.15.6.21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한단고기가 79년 이전에 쓰여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한단고기가 79년 이전에 쓰여졌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의가 없는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말투를 좀 곱게 써주세요. :( 이건 위키백과 최상위 정책입니다. --Klutzy 2006년 5월 26일 (금) 15:52 (KST)답변
책에는 정신이 담깁니다. 단군은 백성을 위해 모든 특권을 희생한 성군입니다.
환단고기류와 규원사화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비교해 보기로 하죠.
환단고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기고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고, 나라를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평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쳐도 감화되지 않습니다.
이는 국민을 억압하는 절대군주나 제국주의에서나 가능한 논리입니다.
반면, 규원사화의 단군을 살펴봅니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약한 백성들이 가난하고 괴롭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하게만 하겠는가' ...
규원사화에서는 이들 중 규칙을 어겨 벌하여야 하는 경우에도 스스로 감화되기를 기다립니다. 단군팔조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으로부터 출발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역사는 문화민족의 긍지를 갖는 우리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jtm71 2006년 7월 17일 (월) 10:37 (KST)답변
단기고사가 환단고기와 유사점이 많다 하나 단기고사의 내용으로 환단고기를 판단하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문화민족의 긍지를 갖는 우리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는 본인의 주장이네요.--퇴프 2007년 10월 7일 (일) 13:11 (KST)답변

단군세기의 저자 관련 ...

단군세기의 저자라는 행촌 이암의 한자가 '李椎'로 되어 있던데, '椎'는 '추' 자이고, 원래는 뫼산'山' 위에 물건 품'品'자로 된 글자입니다. 윈도우즈에서 찾을 수 없는 한자인 듯한데, 이 글자로 고칠 수 있을까요 ... jtm71 2006년 7월 26일 (수) 17:54 (KST)답변

嵒인가요? --Puzzlet Chung 2006년 7월 26일 (수) 18:26 (KST)답변

쓸 수 있는 글자였군요. 내용 확인은 http://kdaq.empas.com/koreandb/history/kpeople/person_view.html?id=0009988 에서 하시면 되고요 ... 본문 내용은 고쳐 놓겠습니다. jtm71 2006년 7월 26일 (수) 20:33 (KST)답변

환단고기의 1979년 판본에 대한 이견 ...

본문에는 ' 1949년에 이유립이 오형기에게 정서시킨 것을 1979년에 공개'하였다고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1979년 출간된 것은 아무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새로 적은 것이고, '정오표'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1949년본'은 최근의 원본 발견 소동에 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성신여대 영인본은 그 원본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말 그대로 '영인본'입니다. 기증 연대도 1989년이라 언제 씌여졌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출간된 책만을 근거로 한다면 어떤 내용이라도 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후에 내용을 고쳤으면 합니다. jtm71 2006년 7월 31일 (월) 03:06 (KST)답변

내용 수정했습니다. 관련 사이트 링크 입니다. jtm71 2006년 7월 31일 (월) 21:05 (KST)답변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뭉게구름 2006년 8월 1일 (화) 08:58 (KST)답변

1911년 출간본 발견 주장에 대한 이견 ...

금년 초에 있었던 숙대 영인본 건은 학계에서 인증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숙대의 환단고기에 대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잘 살펴 보시면, '影印本'이라는 기재사항을 확인할 수 있고, 1979년 발행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다른 링크를 보시면, 뒷면에 1979년 발행되었음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1911년에 출간되었다면, 영인본이 아닌 프린트본이었을 것입니다. 저 정도의 인쇄 기술과 종이라면 당시에 보유하고 있었을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사서들을 직접 영인하기에도 충분합니다만, 숙대 영인본은 필사본의 영인본입니다.

1979년 판본은 왠만한 도서관에는 기증되어 있으므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으니 먼저 이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본이 있더라도 그 연대의 고증에 이견이 생기는데, 1989년에 기증된 영인본으로 어떻게 원본 주장을 할 수 있는 지가 의아할 뿐입니다. jtm71 2006년 8월 2일 (수) 08:23 (KST)답변

그렇군요. 79년 재판을 찍었다는데, 그게 원본 재판인지 필사본 찍은 건지는 확인이 안 되었군요? -- 멀뚱이 (토론) 2006년 8월 2일 (수) 10:28 (KST)답변

제가 확인한 1979년 판본은 '광오이해'에서 출간된 것이었습니다. 옛날 책처럼 만들어져 있더군요. 기증날짜가 12월 중순이었고, 음력 10월 3일이 11월말이니까 출판 후 곧바로 기증된 듯합니다. 링크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숙대 영인본은 '배달의숙'에서 발행한 1983년본에 가까울 듯합니다. jtm71 2006년 8월 2일 (수) 13:13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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