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데시야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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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데시야스 조약(스페인어: Tratado de Tordesillas, 포르투갈어: Tratado de Tordesilhas)은 스페인포르투갈간의 유럽 대륙외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494년 6월 7일 스페인토르데시야스에서 맺은 조약이다. 대서양태평양 상에 새로운 분계선을 정한 기하학적 영토 분할 조약이며, 영토 분쟁을 평화롭게 마무리 지은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보라색 점선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1493년에 지정한 경계선이고, 보라색 실선이 1494년에 수정된 경계선으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맺어진 선이다. 태평양에 그려진 녹색선은 1529년에 태평양의 경계를 정한 선이다

경계선은 카보베르데 섬 서쪽 서경 46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그어져, 조약상 경계선의 동쪽으로는 모두 포르투갈이, 서쪽의 아메리카 지역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하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인도산 후추를 독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포르투갈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었고, 남미 대륙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 조약으로 인한 것이다.[1][2]

역사편집

1493년 3월,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지원받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몇몇 개의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고 귀국했는데, 그 섬들은 1479년에 양국간에 체결된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영토에 속하기 때문이었다.[3] 양국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93년 5월3일 칙령를 발표했고 이어서 이와 관련된 칙령 또한 추가로 발표했다.[4] 칙령의 주요 내용은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100 레구아(서경 38도) 떨어진 지점의 자오선을 분기점으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토로 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는 칙령이 포르투갈에게 너무 불리하였기에 교황의 중재안에 불복하였다.[5]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 단독으로[6] 약 1년여의 협상 과정을 거쳐 새로운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2] 교황의 칙령과 달라진 점은 서경 38도 지점에 그려졌던 경계선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약 46도 지점을 기준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하였다. 조약에 의해 필리핀은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교황 율리오 2세의 재위시절인 1506년이 되어서야 교황청으로 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 조약은 19세기에 유럽 열강아프리카 대륙을 민족 구성, 자연환경, 문화적 요소 등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경계선을 설정하게 되는 선례가 되었다.

세력권은 분할되었지만, 두 나라의 정책은 180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와 지금의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등 직접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굳혔지만, 포르투갈은 직접 식민 지배를 하지 않고 고아 주마카오처럼 항구 도시를 건설하여 무역 거점으로 삼는 방식을 채택했다(브라질은 예외).

이 조약이 체결된 1494년 시점에서는 아직 종교 개혁이 시작되지 않아 교황의 절대적 영향력이 막강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 못했거나(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지 상태(네덜란드)였고, 여전히 지중해 무역에 집중하는(베네치아 공화국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등으로 인해 두 나라는 방해받지 않고 독점을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황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거세게 해상 무역에 도전하면서 이 조약은 유명무실해졌다.[2]

사라고사 조약편집

마젤란 함대를 계승한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는 세계 일주 항해를 이룩하고, 1522년에 유럽으로 귀환하면서 새로운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지도에 남북으로 선을 그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를 정하고 있었지만, 지구가 둥글면 불완전한 경계인 것이다. 따라서 분할이 의미가 없지 않느냐 하는 당연히 의문이었다.

특히 양국은 당시 동남아말루쿠 제도의 귀속을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말루쿠 제도는 당시의 귀중품이었던 향신료의 일대 산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대의 ‘말루쿠 제도’라고 하는 것은 현대에서 말하는 마크 제도, 부루 섬세람 섬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한 말루쿠 해를 둘러싼 섬도 "말루쿠 제도"로 분류되어 향신료 산지로 유명했다.

이렇게 아시아의 선긋기를 위한 교섭을 새로 발효된 것이 1529년 4월 22일에 비준된 〈사라고사 조약〉이다. 사라고사 조약은 말루쿠 제도의 동쪽 297.5 리그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두 번째 경계로 했다. 이 위치적으로는 부루 섬의 동쪽 1425km, 동경 144도 30 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자오선은 뉴기니 섬 중앙부를 통과한다. 포르투갈은 이 조약을 맺고 아시아의 지위를 보전받는 대신, 스페인에 배상금을 지급하게 된다.[7] 이에 따라 포르투갈의 마카오의 권익이 승인되었다. 스페인호주 전역에 대한 우선권을 획득했지만, 포르투갈에 의한 조사를 금지한 흔적은 없다. 필리핀은 자오선의 서쪽인데 이 조약에서 스페인령이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서울경제] 토르데시야스 조약…지구를 반씩 나눠 먹다 2007. 6. 7.
  2. 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103페이지
  3. 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
  4. 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264페이지
  5. 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페이지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이러한 교황의 칙령에 강하게 반발했다.
  6. 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264페이지 부패한 스페인 출신 교황에게 진저리가 난 주앙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이사벨 1세 여왕과 직접 협상을 하기로 결심했다.
  7. 진 프리츠 <삐딱하고 재미있는 세계탐험 이야기> 푸른숲, 195페이지 ,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35만 두캇트를 받고 포르투갈에 양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