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서현(巨黍縣)은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기흥구 일대에 신라시대에 있던 옛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이후, 고구려 때 용인의 지명은 구성(駒城)이었고, 멸오라는 별칭이 있었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 군현을 정비하면서 그 명칭을 거서로 바꾸고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구성은 본래 큰 성 또는 높은 성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거서도 크다는 뜻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그 개칭 시기에 대해서 757년(경덕왕 16)이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1]

유래 편집

거서현은 원래 백제의 멸오(滅烏)이다. 멸오는 말아로 읽히는데 현대어 마루(宗)과 어휘상 관련이 있다 여겨지고 크다는 의미이다. "거서"는 이의 한자표기이다. 고구려 이름인 구성(駒城)이라는 이름은 "말아"를 말(馬, 駒)로 훈차한 것이다.

멸오란 이름은 그 뜻 때문에 장수왕 대에 이 근방에서 고구려군이 백제군을 섬멸해 그 시신이 까마귀떼를 이룬 것 같다 하여 "滅烏"라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1]

연혁 편집

  • 백제의 영역으로 멸오현(滅烏縣)이었다.
  • 475년 고구려군이 대대적으로 남침하여 한성 백제를 패망시킨 뒤 일시 고구려땅이 되었다. 고구려에 의해 구성현(駒城縣)이 설치되었다.
  • 고려시대에 용구현(龍駒縣)으로 개명했다. 독자적인 행정단위가 되지 못하고 광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개명하고 현의 치소를 구성에 두었다. 수원진관(水原鎭管) 소속으로 종 5품의 현령이 파견되었다.

  • 조선 후기에 면리제에 의해 16면으로 구획되었다.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縣)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郡)으로 승격되어 충주부관할 용인군이 되었다.

수여면 소학동(巢鶴洞)으로 치소가 옮겨졌다.

  •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인근의 양지군 전역과 죽산군중에 원일면·원삼면·근일면·근이면·근삼면을 합병하여

지금의 용인시와 비슷한 관할이 완성되었다. 군청도 수여면 김량장리로 옮겨졌다.

행정구역 (조선후기 이후기준, 위치는 현재의 행정구역명칭) 편집

기흥구

-1914년이후 읍삼면, 1931년 이후 구성면-

  • 읍내면(邑內面);옛 용구현의 치소,-구성동, 마북동
  • 동변면(東邊面)-세기말의 어정동
  • 서변면(西邊面)-보정동

-1914년이후 기흥면-

  • 구흥면(駒興面)-구갈동, 신갈동

수지구

  • 수진면(水眞面)-수지구 대부분 지역

처인구

  • 수여면(水餘面)-구 용인읍, 현재 동지역중에 동부동을 제외한 전역. 동부동은 옛 양지군에 속함

이동읍(처인구)

  • 상동촌면(上東村面)
  • 하동촌면(下東村面)

남사읍(처인구), 옛 처인현 지역

  • 현내면(縣內面)-방아리 북부, 창리, 아곡리(衙谷), 완장리
  • 도촌면(道村面)-봉명리 동부, 북리, 봉무리
  • 서촌면(西村面)-봉명리 서부, 통삼리
  • 남촌면(南村面)-방아리 남부{=아리실(牙谷)}, 원암리, 전궁리, 진목리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향토문화대전》, 거서현 Archived 2014년 2월 2일 - 웨이백 머신 (巨黍縣, 용인 법령과 제도)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