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중동 전구(영어: Middle East Theatre of World War II)는 제2차 세계 대전서남아시아북아프리카의 연합군에 의해 둘러싸여 생긴 영국의 일련의 중동에서 작전을 의미한다. 1943년부터, 작전과 관련된 병력 대부분은 인접한 지중해 전장에 있었다.

중동 전구
지중해 및 중동 전구의 일부
날짜1940년 6월 10일 ~ 1943년 10월
장소
결과 연합국의 승리
교전국

영국의 기 영국

자유 프랑스 자유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폴란드 서부군
그리스 왕국의 기 그리스 왕국

소련의 기 소련 (1941)

나치 독일의 기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의 기 이탈리아 왕국
이란 이란 제국 (1941)
이라크 이라크 왕국 (1941)
프랑스 비시 프랑스

지휘관

영국 아치볼드 웨이벌
영국 클로드 오친렉
영국 헨리 M. 윌슨
소련 드미트리 코즈로프
소련 세르게이 트로피멘코
오스트레일리아 존 러바락

자유 프랑스 파울 레젠틸홈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알베르트 케셀링
나치 독일 베르너 준크
프랑스 앙리 덴츠
이라크 라시드 알리
헤자즈 왕국 하즈 아민[1]
이라크 살라 엣딘 에스사바흐
이라크 카말 샤비브
이라크 파흐미 사이드
이라크 마흐무트 살만
이라크 파우지 알 카우크지
시리아 미카엘 알파크
이란 레자 샤 팔라비
이란 알리 만수르
이란 모하마드 알리 포루기

이란 고라마리 바얀도르

독일의 구상 계획 편집

1940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고 난후 독일 육군과 일본 육군은 중동의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경계로 세계를 분할할 것에 협의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이집트의 카이로를 넘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후 인도를 침공하는 제 1 진로와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한 후 북상 및 동진하여 오스트레일리아스리랑카를 점령하는 제 2 진로, 캅카스산맥을 넘어 동맹국 팔레비 왕조와 연합하여 발루치스탄을 공격하는 제 3 진로를 구상하였다. 이에 맞추어 일본 역시 미얀마를 점령한 후 아삼 지방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인도를 장악하는 1로, 충칭 지역을 점령한 후 티베트신장 지역을 침공해 카스피해아랄해로 진출하는 2로, 호주 폭격을 통해 독일군과 만나는 3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타격을 입음으로써 추축국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영국-이라크 전쟁 편집

독일이 프랑스 점령 이후, 이라크에서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라시드 알리는 쿠테타를 일으키고 이라크를 장악했다. 그리고 친영파를 내쫓고 영국 공군이 있는 하바니야를 포위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한 영국은 독일이 공군을 모술에서 파견하고 군대가 오기 전에 먼저 트랜스요르단과 쿠웨이트를 통해 하바니야와 바그다드로 파병함으로써 하바니야를 포위하는 이라크군을 격퇴하고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이라크는 항복하고 다시 친영파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라시드 알리는 이란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키르쿠크에서 하이파까지의 송유관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

비시 프랑스령 시리아, 레바논 점령 편집

프랑스 항복 이후 중동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붙었으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안전을 위해 시리아와 레바논을 침공한다.시리아와 레바논의 프랑스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6월 21일 다마스쿠스가 점령당하고, 7월 6일 베이루트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6,000여명은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이란 전역 (페르시아 회랑) 편집

이란은 본래 영국의 보호령이였으나, 레자 샤 팔라비가 쿠테타를 일으키고 이란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득을 보았으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소련과의 보급을 위해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점령하였고, 연합국의 압력으로 인해 팔라비는 쫓겨나게 된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Patterson, David (2010). 《A Genealogy of Evil: Anti-Semitism from Nazism to Islamic Jiha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4쪽. ISBN 978-0-521-13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