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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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조선 숙종|숙종]]은 4월 2일<ref>《숙종실록》에는 음력 4월 1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4월 2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다.</ref>, 폐인(廢人: [[인현왕후]])을 언급하는 자와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무조건 대역죄를 묻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피력했다.
 
{{인용문|“거센 신하의 흉악한 잔당으로서 국본(國本: 왕세자)을 동요하는 일이 있는 자와, 폐인(廢人)【중궁(中宮)을 가리킨다.】·홍치상(弘致祥)<ref group="주석">[[조선 숙종|숙종]]의 고종형으로 [[숙안공주]]의 아들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1688년에 처질녀인 [[영빈 김씨]]와 함께 [[희빈 장씨]]의 어미와 [[조사석]]에 대한 거짓 추문을 만들어 퍼트린 것이 [[기사환국]] 후 [[남인]]의 정치적 보복의 일환으로 [[김만중]]과 [[이사명]]이 취조하던 과정 중에 드러나 [[영빈 김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홍치상]]은 다른 여죄(무고 3차례)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ref>·이사명(李師命)<ref group="주석">노론4대신인 [[이이명]]([[김만중]]의 사위)의 형이자 [[이관명이건명]]의 사촌형으로, [[경신환국]] 때 [[김석주]], [[민정중]], [[김만중]]과 함께 [[남인]]에 대한 편파적 강경 처벌을 행하였으며, 이 과정 중에 간계를 서슴치 않았기에 [[남인]]의 원한을 받았다. 왜인과 내통한 혐의로 구속되어 국문되다가, 인척인 [[홍치상]]과 함께 종실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 했던 사실이 발각되고, 사돈인 [[김만중]]이 1688년 대내에서 [[조선 숙종|숙종]]을 조롱했던 [[조사석]]의 추문이 [[홍치상]]에 의해 만들어져 이사명이 [[김만중]]에게 전달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처참되었다.</ref> 등을 위하여 신구(伸救)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논할 것이고, 이상(李翔)<ref group="주석">[[인현왕후]]의 언니의 시숙이자 [[인현왕후]]의 외사촌오빠인 [[송병문]]([[송준길]]의 손자)의 장인이고 [[김제겸]]([[김수항]]의 손자. [[김창집]]의 아들)의 처조부이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수록된 "민진후(閔鎭厚)가 그(李翔)의 인척(姻戚)이란 이유로 사정(私情)에 끌려서 금령(禁令)도 마음에 두지 않고 곧바로 신설(伸雪)을 청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와하였다." 문구는 이들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드러낸다.</ref>을 위하여 신구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결단할 것이다. 이 뜻을 중외(中外)에 명백히 포고하라.”|《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5번째기사 }}
 
또한, 갑술환국이 발발한 4월 1일, [[남인]]이 대거 엄형을 받고 출척되는 상황에 [[민암]]과 오랜 친분이 있어온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스스로 죄를 청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라며 위로하였다.<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일 (무진) 원본356책/탈초본18책 (6/1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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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인현왕후]]는 새로이 즉위식을 하여 왕비로 복위할 수 있었으나<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1일(정유) 3번째기사 </ref>,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옛 왕조의 좌우황후(左右皇后)의 예를 받들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히 높이고 호칭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3일(정유) 5번째기사 </ref>, 우의정 [[윤지완]]은 [[인현왕후]]와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ref group="주석">[[윤지완]]은 [[민진원]]의 장인 [[윤지선]]의 아우로, [[인현왕후]]의 둘째 올케의 숙부이다.</ref>사직서를 들고 [[조선 숙종|숙종]]과 면담하여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그녀의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올려줄 것을 청하고 수년이 넘도록 [[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으며<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윤5월 27일(계사) 2번째기사 </ref><ref>《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30일(신묘) 3번째기사</ref> [[서문중]] [[박만정]] 등 [[소론]]이 연이어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하고, 공사(公事) 중에도 [[소론]]은 [[희빈 장씨]]에게 감히 후궁의 작호로 호칭할 수 없다 하여 모처(某處)라고 돌려 호칭하니<ref>《조선왕조실록》숙종 29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8월 3일(임진) 1번째기사</ref>, 이러한 사정은 1701년 [[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여 [[희빈 장씨]]의 복위가 불가피해진 상황 속에 [[숙빈 최씨]]의 발고로 터진 [[무고의 옥]]의 배경이 되었으며, [[무고의 옥]]은 [[인현왕후]]의 당파인 [[노론]]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독점케하여 1699년을 시점으로 탕평책을 주장하던 [[소론]] [[최석항]] 등의 중재 아래 극소수 조정에 복귀했던 [[남인]]이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 간계를 꾸며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역당으로 변모되어 다시 출척되고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하기까지 정계에서 사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ref group="주석">[[조선 영조|영조]] 말년에 [[남인]]도 관직을 받았으나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하였을 당시 5품 이상의 [[남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만큼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ref>, [[희빈 장씨]]의 무죄 혹은 경형을 주장했고 [[남인]]에 대한 온건 정책 및 탕평책을 주장했던 [[소론]] 역시 [[노론]]에 의해 역당의 무리로 규정되어 중형을 받고 영구히 정계에서 축출될 뻔하였기에 감정이 불구대천의 원한으로 격화되었다. 이후 [[소론]]은 왕세자([[조선 경종|경종]])를 지지하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조선 영조|영조]])을 지지하여 경쟁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 경종|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조선 영조|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나주벽서 사건, 토역경과투서 사건 등의 계기가 된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