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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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익'''(崔昌益, [[1896년]] ~ [[1957년]] [[10월]])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공산주의자]]이다. [[일본]] 유학 중인 [[1923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1925년]] 이후 [[공산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 검거를 견디지 못하고 [[1934년]]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탈퇴, 1936년 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뒤 [[김원봉]] 일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결렬, 화북으로 건너가 [[무정 (사람)|무정]](武亭), [[김두봉]] 등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다.
 
[[8·15 해방]] 이후 [[북조선]]으로38선 이북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재정상, 부수상 겸 재정상, [[1955년]] 국가검열상 등을 역임했다.
 
56년 8월 [[김일성]]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과 [[박헌영]]의 공격에 동참했지만 그해 [[9월]]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중국]]의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그를 변호하여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그해 [[10월]] 재투옥 후 옥사한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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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최창익은 [[1896년]] [[함경북도]] [[온성군|온성]](穩城) 남양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일은 전하지 않는데 이는 해방 후 [[북조선]]에서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반당 종파분자로 숙청당했고, [[남한]]에서는대한민국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언급 금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근처의 신식 소학교에 들어갔고, [[1917년]] [[경성부]]로 올라가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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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북조선신민당|북조선로동당|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1945년]] 8월 중국 체류 중 [[조선공산당]] 정치국 국원에 추대되었다. [[12월]] [[평양]]으로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의 [[북조선]]38선 이북 귀환자들과 함께 [[북조선신민당]]을 창건하였다.
 
최창익은 이때 '조선민주운동'의 해방 이전 역사를 논의하는 [[1946년]]의 팜플렛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계급투쟁을 민족투쟁으로 효과적으로 흡수시켰는데, 이러한 경향은 북한 이데올로기의 이정표가 되었다.<ref name="buuk113">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역, 서해문집, 2006) 11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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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북조선노동당]] 상임위원,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열국장을 거쳐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참여와 숙청 ===
==== 최고인민회의,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참여 ====
{{참고|최고인민회의|한국 전쟁|연안파}}
1948년 [[2월]]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 및 제1기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월]]의 [[조선로동당]] 통합준비 2차 대회에 정치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9월]]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재정상(財政相)을 맡았다. [[한국전쟁]] 후 [[1952년]] 북조선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부수상에 취임하였다. [[1953년]] [[2월]] 부수상 겸 재정상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종결된 뒤 [[북조선]]에서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경제 개발 문제를 놓고 중공업우선론자와 반중공업 우선론자로 나뉘게 된다. 이때 그는 반(反) 중공업주의를 택한다. [[1954년]] [[3월]] 전원회의를 통해 박창옥, 최창익, 박의환, [[윤공흠]]과 국가건설위원장 [[김승화]] 등은 반(反) 중공업 노선을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ref>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역사비평사, 2000) 207페이지</ref> [[1954년]]의 내각 개편 때 다시 재정상이 되었다가 [[1954년]] [[11월 20일]] 해임되었다. [[1955년]] [[4월 22일]]과 [[4월 23일]] '남반부 출신 중학, 전문, 대학 학생대회'의 위원장으로 행사를 주관하였고, 그해 [[11월]] [[국가검열성]]상이 되었다.
 
1956년 [[박창옥]]·[[윤공흠]] 등과 함께 반당·반국가 종파분자로 비판받고 좌천되었다가 56년 [[8월 30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나중에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되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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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소부르죠아 성격을 가진 신민당을 조직하였던 김두봉, 최창익, 한빈, 리유민, 김민산 같은 자들은 중간에 뛰여들어와 공산당이 이룩한 것을 다 집어던지고 로동당의 첫자리를 차지하려고 접어들었습니다. 이번에 그들이 조작한 폭동음모사건이 이와 관련되여 있습니다. 당의 허물을 억지로 만들어가지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 당을 마스며 당조직을 엎어놓으려고 하는 이런 분자들과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ref>이신철,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2008) 408</ref>}}
 
[[김일성]]은 이미 6.25 전쟁 과정을 통해 북조선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이끈 빨치산파를 '군부파'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소련파와 연안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ref name="gang142"/> 결국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 최창익의 [[김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소련파들은 소련으로 흩어지고 말았다.<ref name="gang142"/>
 
무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일성]]은 최창익과 박창옥을 사대주의적 종파주의자로 몰아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이 이에 반발하여 북한의 내정에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최창익과 [[박창옥]]을 중앙위원으로 복귀시키고, 다른 4인에 대한 출당처분도 취소하게 되었다.<ref>김세균, 북한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국제정치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45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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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이주연 (북조선 사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주연]]
|대수=
|직책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정성|재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