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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묘청을 위시한 서경세력의 주장에도 문제는 없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58"/> 대금정벌론을 내세워 잃어버렸던 민족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높게 평가될 수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 서경천도의 당위성을 지나치게 풍수사상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다.<ref name="pare1996258"/>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남하하여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낸 상태였다. 말하자면 금나라는 중국대륙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막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특히나 금나라는 잘 훈련된 기마병을 주력 부대로 영토확장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반해 고려군은 기마전술에 약했기 때문에 보병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었다.<ref name="pare1996258"/> 그런데 [[금나라]]를 침입하면 반드시 평우너에서평원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는데 보병 중심의 고려군에겐 불리하였다.<ref name="pare1996258"/>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기마병 중심의 금군을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