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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崔沖, [[984년]] ~ [[1068년]] [[9월 15일]])은 [[고려]]전기의 문신(文臣) 겸 정치인, 유학자이다. [[고려 목종|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고려]]에 [[유학]] 열풍을 일으켰다.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ref name="pare199617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78페이지</ref> 또한 [[문종]] 즉위 후 법령을 개정하여 [[고려]] 멸망시까지 고려의 국법의 기틀을 완성시켰다. 총 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ref name="pare1996181">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1페이지</ref>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 등을 비롯한 야인들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은퇴 후에는 학당인 [[구재학당]]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했는데 이후 [[개경]]의 사학십이도의 모범이 되었다. 별칭은 '''해동공자'''(海東孔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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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기 ===
최충은 984년에 태어났으며 호는 성재, 월포, 방회 등을 사용했고 자는 호연이다. 해주 최씨 최온의 아들이다. [[1005년]]([[고려 목종|목종]] 8) [[과거 제도|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우습유(右拾遺)에 올라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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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충의 진언은 당시 문하시랑으로 있던 [[김원충]]과 판어사 [[김정준]]에 의해 논박당한다.<ref name="pare1996180"/> '그의 씨족 등록이 안된 것은 그의 조부나 부친의 과실이지 본인의 죄는 아니며 또한 그가 다년간 글공부에 노력한 공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얻었으니 그 스스로에게는 어떤 허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ref name="pare1996180"/>'라며 논박했던 것이다. [[문종]]은 이 두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문종은 최충과는 달리 가끔 예외를 인정하고 인품과 실력을 중시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ref name="pare1996180"/>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의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ref name="pare1996178"/> 그 후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문종]] 즉위 후에는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ref name="pare1996178"/>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나라]]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참고하여, 이 글들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고사를 참고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추원사(刑部尙書中樞院使)로 내직으로 돌아왔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 修國史)로 《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임명되어 변경에 나가 영원진(寧遠鎭)·평로진(平虜鎭) 등 변경에 진(鎭)을 구축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다시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守司徒 修國史)가 된 뒤 상주국(上柱國)의 훈위를 받고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 법률 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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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십이도 중 역시 으뜸은 최충의 문헌공학도였다. 최충의 시호를 따서 사후에 붙여진 이 학도의 수는 그의 사후에도 수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 주도하에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ref name="pare1996182">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2페이지</ref> 이러한 유학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최충의 행적이 흡사 고대 [[중국]]의 [[공자]]에 비견된다 하여 그에게는 '''해동공자'''라는 별칭이 붙었다.<ref name="pare1996182"/>
 
[[1055년]] 70세 이상의 고령인데도 특명으로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된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에 서훈되었다. [[강감찬]], [[황보유의]], [[왕가도]] 등과 교류하였으며, 그의 문하생으로는 [[김양감]], [[이주좌]] 등이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1068년]] [[9월 15일]]에 개경에서 생을 마감하니 향년 83세였다85세<ref>해주 최씨 문중 기록에는 83세로 전한다.</ref>였다.
 
=== 사후(死後) ===
최충의 아들 최유선은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아버지 최충을 계승하여 [[유림]]의 영수로 지냈으며, 최사추, 최사제 등 그의 아들들 또한 문재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다.<ref name="pare1996182"/> 최충은 많은 책들을 남기긴 하였으나 [[무신정권]] 시절에 거의 사라졌고, 몇 개의 시구와 금석문이 남아있을 뿐이다.<ref name="pare1996182"/>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 등이 현재 전한다. 그 뒤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가 그 후에 선종의 사당에 함께 배향(配享)했다.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 사상과 신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