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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계 사서와의 대조 ====
현대에는 게이타이 천황 이전의 기술(특히 편년)은 정확함을 보증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면 게이타이 천황의 사망 시기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세 가지 이설이 전해지는 등 기술이 중첩되는 점, 또한 《일본서기》 편찬자가, 한반도 계통의 사서로 추정되는 《[[백제본기]](百濟本記)》에 근거해, [[531년]]설을 본문에 채용한 것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다. 《백제본기》는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과 함께 '백제삼서(百濟三書)'라 불리며, 풍부한 기록성으로 3서 가운데서도 《일본서기》 편찬에 가장 많이 인용되었던 사서이다(《삼국사기》 백제본기와는 다르다). 종래의 일본 학자들은 6세기 후반 [[위덕왕]](威德王)의 시대에 백제가 왜왕에게 제출하고자 편찬한 것을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참조했으며 이 '백제삼서'와 《일본서기》 기사를 대조해 나가면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여기에는 백제가 일본의 전통적인 속국이었다는 인식이 수반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을 《백제본기》에 기초한 《일본서기》 게이타이기(繼體紀), 긴메이키(欽明紀)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이 많이 있는데<ref>백제삼서의 기사 중에는 백제왕이 마치 천황의 '백성'과 '봉해진 땅'을 다스리며 천황에게 '조(調)'를 바치며 섬겼던 '미야케(官家)'의 나라였고, 원래의 천황의 '봉지(封地)'를 침범하여 '신라가 차지한' 가야 제국(加羅諸國)을 천황의 명으로 '본래대로 되돌리려' 하는, 천황에 대해서 백제를 '번국(蕃國)'이자 '번신(蕃臣)'으로 자처한 듯한 기술이 넘쳐나고 있으며, 백제왕이 천황으로부터 [[전라북도]] 땅을 '수여'받았다고까지 적기도 하였다.</ref>, [[임나 일본부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에 대한 기술(《백제본기》에 이르기를 "임나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고 일본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진구기(神功紀) ・ 오진기(應神紀)의 주석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아 귀국은 사치히코(沙至比跪)를 보내어 치게 하였다." 등 왜국을 '귀국(貴國)'이라 부른 기술이 있는데<ref>이밖에도 "아화왕(阿花王)이 서서 귀국에 예를 잃었다", 혹은 "(목만치는) 우리 나라(백제)에 들어와 귀국과 오가면서" 등의 기술도 있다.</ref>,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는 이 단어를 종래의 일본 사학에서는 2인칭 대명사로 '당신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일본서기》 본문에는 제3자의 상호간 대화에서도 왜국을 '귀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부분이 있는 점을 들어 '귀국'이란 '가시코키 스메라미코토(可畏天皇)', '히지리노 오키미(聖王)'가 군림하는 '귀한 나라', '신의 나라'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는데, 이처럼 일본을 '아라히토카미(現人神)'가 지배하는 신국(神國)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 백제삼서에 기재된 '일본', '천황' 등 호칭의 출현과 같은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시대의 일이며, 《백제본기》가 다룬 6세기 후반의 시대는 물론 일본 최초의 역사가 편찬되었던 스이코 천황 때에도 이러한 '신국'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