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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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북로독군부는 조직을 정치, 행정과 군사, 지휘로 분권하여 정치, 행정의 총책임자이며 [[북로독군부]]의 대표와 그 부부장은 [[군무도독부]]의 [[최진동]]과 [[국민군]]의 군무위원이었던 [[안무]]가 담임하고, 통합된 [[북로독군부]]의 군사 지휘는 의병 이래의 명장이었던 [[홍범도]]가 맡아 통수토록 하였다.<ref name="yunghans75"/> 이와 같은 [[대한군북로독군부]]의 성립으로 [[온성]]에서 [[두만강]] 건너 북방에 위치한 봉오동 골짜기와 그 부근에 있던 7~8백 명 이상의 [[북로독군부]] 병력과 그 밖에 [[이흥수]](李興秀)가 거느리는 약 60명 가량의 [[신민단]]독립군이 집결하여 봉오동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ref name="yunghans75"/>
 
== 전개 과정 ==
=== 선제 공격 ===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각각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 월신강(月新江)을 넘어 [[간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 기밀을 입수하고 [[만주]] 국경 지대 주변에 활보하는 한국인 독립군 활동에 관심을 갖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던 중이라 이는 전투의 도화선이 된다. 이를 일각에서는 봉오동 전투와 따로 구분하여 따로 [[삼둔자 전투]]로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