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메이 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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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메이지 33년) [[2월 11일]]에 15세의 나이로 다섯 살 연상의 황태자였던 요시히토 친왕과 약혼하고, 같은 해 [[5월 10일]]에 궁중의 현소(賢所)에서 신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카사카 이궁(赤坂離宮), 지금의 영빈관(迎賓館)이다.<ref>결혼할 당시에는 교육계의 늙은 여관(女官)으로부터 궁중에서의 예의 범절을 배우느라 곤욕을 치렀는데, 훗날 이때의 지도가 자신의 소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다.</ref>
 
다이쇼 천황과의 부부 관계는 몹시 양호했으며, 관례를 무시하고 남편의 신변을 돌보는 것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남편을 자주 무시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불만이 많아서 그가 지지하는 여성을 장남 히로히토의 약혼녀로 삼지 않고, 히로히토가 아내가 될 사람을 직접 선택하도록 젊은 귀족 여성들을 초대해 다과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결혼한 이듬해 [[4월 29일]]에 장남 히로히토(裕仁, 훗날의 [[쇼와 천황]])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1902년]](메이지 35년) [[6월 25일]]에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를, [[1905년]](메이지 38년) [[1월 3일]]에 3남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1915년]](다이쇼 4년) [[12월 2일]]에 막내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를 출산하는 등 연달아 네 명이나 되는 황자(皇子)를 낳음으로서 일부일처제 확립에 기여하여, 그녀의 궁중에서의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에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붕어로 황태자였던 요시히토 친왕이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3년 뒤인 [[1915년]](다이쇼 4년) 11월 10일에 [[교토고쇼]](京都御所)에서 즉위 의식이 치러졌는데, 마침 황후는 제4황자(미카사노미야)를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결석하였다. 황실이나 신도 제사(神道祭祀)의 관례나 전통을 소중히 하면서도 노구치 유카(野口幽香) 등 근대 여성교육자를 상담 상대로 자주 궁중에 부르기도 했으며, 시어머니 [[쇼켄 황태후]](昭憲皇太后)의 뒤를 이어 양잠 사업을 장려하여 그녀 자신도 양잠에 임했고, [[한센병]] 구제 사업에 힘써서 등대지기를 지원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이쇼 천황이 병으로 집무를 볼 수 없게 되면서는 천황을 몸소 간병하는 한편, 천황을 대신해 황실을 관리하며 조정의 원로나 중신들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1926년]] 12월 25일에 다이쇼 천황이 하야마(葉山)에 있던 황실 별저에서 붕어하고 섭정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이 황위를 이어받으면서(쇼와 천황) 황태후가 되었다.
 
다이쇼 천황이 붕어한 뒤 데이메이 황태후는 일과의 나머지 시간, 오전과 오후의 하루 두 번씩 다이쇼 천황의 초상화가 안치된 방에서 지냈는데,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증언에 따르면 그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고 하며, 손주인 쇼와 천황의 황자녀나 막내아들 미카사노미야의 자녀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1931년]](쇼와 6년), 데이메이 황태후의 하사금을 토대로 일본에 '나병 예방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그녀의 생일의 전후가 '나병 예방의 날'로 지정되었다(현재는 '문둥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간'이라고 개칭).<ref>황태후의 경제 지원으로 생활이 구제된 환자도 있지만 한편으로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제격리가 정당화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또, 이러한 활동이 황태후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인자하신 황실의 성은'으로서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다.</ref> 패전 뒤에는 시즈오카(静岡)의 황실 별장에서 보냈다. [[1951년]](쇼와 26년) 5월 17일,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