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must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Almust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8번째 줄:
[[1928년]]에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남궁염은 이승만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와 함께 뉴욕동지회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남들처럼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뉴욕총영사가 되어 활동했다.<ref>"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년 02월 23일자 1면, 정치면</ref> 한편 그의 부인 우복자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의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영사관 건물을 마련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兼任理事官)에 임명되었다.<ref>"정부인사발령", 경향신문 1955년 07월 08일자 1면, 정치면</ref> [[1960년]] 4.19가 터지자 이승만의 사퇴 후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기타 ==
16번째 줄:
그의 부인 우복자는 이승만이 자신의 약혼자인 프란체스카를 오스트리아에서 뉴욕으로 데려오던 날 이승만과 함께 마중을 나간 이후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스고 틈이 날 때마다 조선 사회에 대한 코치를 해주기도 했다.
 
== 관련 항목 ==
* [[대한민국의 외교]]
* [[삼일신보]]
*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
* [[남궁억]]
* [[이승만]]
* [[윤치호]]
* [[윤광선]]
* [[뉴욕 총영사]]
* [[윤장선]]
 
== 외부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