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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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용모가 수려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노식]](盧植)과 [[유관 (후한)|유관]](劉寬)의 밑에서<ref name=a>《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ref> 학문을 익혔다. 공손찬은 처음에 [[요서]] 군현 문하의 서좌(書佐) 직위에 있었다. 그 곳의 태수가 공손찬이 변설에 능하고 지혜가 있는 것을 보고 탁군의 [[노식]]의 문하에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이후 [[효렴]](孝廉)에 천거됐고,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에 임명됐다. 그 곳에서 [[선비족|선비]](鮮卑) 기마병들과 맞서 싸웠고, 이후 탁령(涿令)으로 영전되었다.
 
어양(漁陽) 사람 [[장순 (후한)|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과 요서속국(遼西屬國)을 공격하였다. 공손찬은 병사를 이끌어 장순을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공으로 기도위(騎都尉)로 승진됐다. [[오환]](烏丸)의 탐지왕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분위장군(奮威將軍)에 계후가 되고 북평태수(北平太守)까지 올랐다. 공손찬은 궁술에 뛰어난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부하 수십 명은 모두 백마를 타고 있었으므로 ‘백마의종(白馬義從)’으로 불렸으며 변경의 이민족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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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주목(幽州牧)에 황족 [[유우 (후한)|유우]](劉虞)가 부임하여 덕으로 이민족을 복종시키자, 무력으로 다스리던 공손찬과 대립이 일어났다. 한때는 [[원소 (후한)|원소]](袁紹)까지도 위협하여 기주(冀州) · 청주(靑州) · 연주(兗州)를 지배하였지만 [[반하 전투]]에서 원소에게 참패하게 되자 세력을 잃고 귀환하였다. 그리고 공손찬의 야심을 두려워한 유우에게 공격당하지만, 이를 격파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공손찬은 ‘[[황제]]라고 자칭했다’고 무고하여 유우를 처형, 유주를 탈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수단으로 민심을 잃게 된다.
 
[[건안]](建安) 3년([[198년]]), 원소의 대군에 농성전으로 대항하였으나, 다음해 봄 아들 [[공손속]](公孫續)을 사신으로 보내 [[장연]](張燕)의 구원을 받아 봉화를 신호로 안팎에서 협공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사자 [[문칙]](文則)이 원소의 척후병에게 사로잡혔고, 원소는 신호를 반대로 취해 거짓 봉화를 올렸다. 공손찬은 봉화에 응하여 출병하였으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만다. 공손찬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원소 (후한)|원소]]군이 지하도를 파 안에 불을 지르자, 성벽 기초가 불타 무너지고, 원소군이 입성하자 패배를 인정하고 불타는 역경루 속에서 처자와 함께 자살하였다.<ref>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ref>
 
==《[[삼국지연의]]》 속 공손찬==